저마다 바쁜 일과를 마친 퇴근 후. 3일 저녁 서울 서초구 방배동 ‘라라스튜디오’ 문 밖으로 노랫소리가 새나왔다. 오후 7시 30분 약속 시간을 앞두고 직장인들이 빗길을 뚫고 하나둘 30평 남짓한 공간에 모여들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것도 잠시,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 이내 표정이 진지해졌다. 테이블 뒤 의자에 나란히 앉은 이들은 익살맞은 얼굴로 양손을 흔들며 뮤지컬 ‘렌트’의 수록곡 ‘라비 보 엠’을 함께 불렀다.
일반인 뮤지컬 동호회 ‘라라뮤지컬’의 연습 현장이다. 렌트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현대화한 록 뮤지컬이다. 이들은 다음 달 12, 13일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홀에서 직접 이 뮤지컬을 무대 위에 올린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의 시대. ‘프로’의 전유물로만 느껴졌던 뮤지컬 공연에 도전하는 일반인이 있다. 20, 30대 직장인을 중심으로 타인과 함께 여가를 즐기고 동시에 뮤지컬의 즐거움을 직접 경험해 보려는 이들이다. 단순 연습 체험을 넘어 직접 무대 위에 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반인 뮤지컬 공연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동호회, 아카데미 등도 활성화되고 있다.
○ 내가 뮤지컬 공연을?
“저도 뮤지컬 무대 위에 설 수 있나요?”
일반인 뮤지컬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대부분 하는 질문이다. 시원한 가창력, 화려한 안무, 진지한 표정 연기까지 세 박자를 고루 갖춰야 하는 뮤지컬 공연의 꿈은 보통 사람에게는 머나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경험자들은 “일단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길이 보인다”고 말한다.
일반인 뮤지컬의 경우 통상 3, 4개월의 연습 기간을 거쳐 공연을 무대 위에 올린다. 길게는 6개월까지 연습을 하기도 하지만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동기 부여가 어렵다. 라라뮤지컬 리더인 정상훈 총감독(52)은 “일주일에 한 번 3시간씩 연습을 진행한다. 현직 연출, 보컬코치 등 전문가들이 주마다 번갈아가며 노래, 안무, 연기 연습을 이끌어 준다”고 설명했다. 노래, 안무에 재능이 있다고 쉽게 생각해서는 오산이다. 라라뮤지컬에서 활동하는 직장인 남정훈 씨(29)는 “안무를 하면서 노래를 하니 더욱 어렵다. 노래도 기교보다는 전달력에 집중하게끔 레슨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예술체험공간 ‘유랑’은 아예 16주 코스로 뮤지컬 공연 커리큘럼을 짜 놨다. 1주 차 오리엔테이션, 2주 차 배역 오디션부터 15, 16주 차 최종 리허설까지 매주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연습을 진행한다. 유랑 탁원태 대표(31)는 “일반인 배우들이 무대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테크니컬 리허설 외에도 최종 리허설만 두 차례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뮤지컬 아카데미 ‘점퍼즈’는 공연반 외에도 원데이 클래스, 뮤지컬 기초반, 보컬 심화반, 뮤지컬 댄스반 등 다양한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 현직 전문가들이 수업을 이끈다. 연출도 프로가 한다.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일자리를 제공하는 효과도 있다는 것이 탁 대표의 설명이다.
바쁜 직장인들이 주로 모이다 보니 추가 연습 스케줄을 잡기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정기 연습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개인 연습에 할애하기도 한다. 출퇴근길이 곧 대본을 외우고 노래를 익히는 연습시간이다. 공연을 앞두고는 밤을 새워 연습을 하는 일도 적지 않다.
적게는 10여 명, 많게는 20여 명이 한 팀이 돼 공연을 준비한다. 대학로 극장 등이 이들의 공연 무대. 기존 작품을 각색하기도 한다. 아예 창작극을 무대에 올리는 곳도 있다. 공연을 앞두고는 포스터, 리플릿 등에 쓰일 전문 촬영도 한다. 무대 의상에 분장을 한 채 찍는 나만의 프로필 사진은 덤으로 얻는 재미다.
공연 참가자들은 대부분 매달 10만∼20만 원의 회비를 낸다. 회비는 주로 레슨비나 운영 경비 등으로 쓰인다. 공연은 대개 무료가 많고 티켓 값을 받더라도 1만 원 이내다. 공연 수익금을 사회단체에 기부하는 곳도 있다.
○ 무대 위 희열을 일상 속 자신감으로
많고 많은 취미 활동 중에 왜 뮤지컬을 택했을까. 이들이 꼽는 이유는 특별함이다. 남 씨는 “다른 동호회 활동도 많이 해봤지만 디데이를 세어 가며 공연을 준비하는 특별함이 있다. 사교 중심의 다른 모임과 달리 목표 지향적인 면이 좋다”고 했다. 7월 라라뮤지컬에 합류한 남 씨는 이번 공연 주연인 로저 역을 맡았다. 석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대부분의 모임이 20, 30대 직장인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물론 대학생이나 40대 이상 참가자도 더러 있다. 유랑의 탁 대표는 “일상에서 표현의 부족함을 고민하는 이들이 많이 찾아온다. 직장생활을 하며 늘 눌러와야만 했던 감정 표현을 이곳에서나마 자유롭게 터뜨리고 싶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무설계사로 일하는 라라뮤지컬의 구소정 씨(20)는 “평일 늦게까지 일하는 때도 많지만 일주일에 하루 연습 날만큼은 가급적 빨리 마무리한다. 뮤지컬을 하면서 일상에서 숨을 돌릴 공간을 찾았다”고 말했다. 남 씨는 “뮤지컬 캐릭터처럼 회사생활에서도 좀 더 의사 표현을 잘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됐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평소 뮤지컬, 노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다. 10년 넘게 아카펠라 동호회에서 활동해온 고등학교 교사 금도성 씨(35)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싶어 찾아왔다. 아카펠라에서 전체적인 조화가 중요하다면 뮤지컬에서는 내가 무대 전체를 끌고 나가는 때도 많다. 이전까지 내가 팀의 일부로 공연을 했다면 지금은 ‘내 공연’을 하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평소 버스킹 공연을 하는 구 씨는 “노래에 감정을 담아 전달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덧붙였다.
어릴 적 품었던 뮤지컬 배우의 꿈을 경험해 보려고 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뮤지컬 아카데미 점퍼즈의 강승우 대표(33)는 “나를 되찾았다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점퍼즈 회원 중 5명이 현재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도 고민하고 있을 누군가에겐 일단 도전하라는 조언을 건넸다. 금도성 씨는 “노래를 못해도, 춤을 못 춰도 저마다 맞는 다양한 캐릭터가 뮤지컬에 있다. 앞에서 끌어주는 선생님과 같이 참여하는 동료가 있는 이상 당신도 할 수 있다. 부담감을 내려놓고 도전하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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