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fake) 뉴스’라는 말을 가장 자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다. 아연한 일이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된 첫해에 하루 평균 5.9건의 거짓말을 쏟아놓았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의 추산이다.
그런데 왜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이 그리 많을까. 코네티컷주 출신 미국인이자 서적·문학비평가인 저자는 ‘진실 경시’를 가져온 미국 사회의 지적 풍토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미국의 지적 쇠퇴를 지적한 것이 그가 처음은 아니다. 작가 수전 저코비는 트럼프 취임 10년 전 ‘오락프로그램 중독, 종교근본주의, 지성주의를 미국의 전통적 가치관과 불화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 부실한 교육제도’가 지성의 쇠퇴를 불러왔다고 진단했다.
저자도 이런 시각에 동의한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지식사회적 배경을 언급한다. ‘보편적 진실은 없다. 개개의 작은 진실들이 있고, 모두가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상대주의 관점이다.
저자는 이런 상대주의가 20세기 후반을 휩쓴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이고 단일한 진실이란 없으며 지식은 계급, 인종, 성(性) 등 다양한 프리즘을 통해 여과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정당한 권리를 박탈당했던 약자와 소수자들이 자기 권리를 위해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도 발생했다. 지구의 시작은 6000년 전인가, 45억 년 전인가. 인간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는 대기와 바다의 온도를 높이는가, 아닌가. 여기에는 계급 인종 성 등에 따른 프리즘이 작동할 여지가 없다. 진실과 거짓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급진적 포스트모더니즘은 ‘최선의 진실을 확인하려는 노력이란 헛수고’라고 비웃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상대주의의 잘못된 적용이 문제인 것이다.
트럼프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주인공이었다. 예전부터 그는 “내 자산은 질문을 받을 때,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식의 상대주의는 나치나 볼셰비즘 같은 전 세기의 전체주의를 연상시킨다. 나치도 “과학 따위는 없다. 독일인의 과학, 유대인의 과학 등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판에 박은 문구를 반복하고 적에게 꼬리표를 붙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유대인을 표적으로 삼은 것처럼 오늘날의 미국 집권자도 이민자,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이슬람교도 등을 백인 노동자 계층의 희생양으로 내놓는다. 해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전체주의의 이상적인 대상은 확신에 찬 당원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썼다.
여기까지가 미국의 현실이다. 이제 책을 덮고 우리를 돌아보자. 저자는 “페이스북 같은 (SNS) 플랫폼은 사용자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사용자가 무엇에 강하게 반응하는지 예측해 그런 것을 더 많이 제공한다”며 “데이터 과부하의 세계에서는 제일 큰 목소리와 충격적인 견해가 가장 입소문을 탄다”고 지적한다. 내가 세상을 내다보는 창은 믿을 만한 근거에 기초하고 있는가.
극작가 아서 밀러는 2004년 대선 직전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조지 W 부시 지지자는 하나도 없는데 여론조사 결과가 어떻게 막상막하일 수 있지?”라고 의아해했다고 한다. 우리도 종종 비슷한 궁금증을 갖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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