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건 조용히 대비하는 사람이다[오늘과 내일/하임숙]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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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소재부품 ‘대기업 책임론’… 산업계 대비할 돈-제도-시간 줘야

하임숙 산업1부장
하임숙 산업1부장
정부와 여당이 ‘소재·부품·장비산업(소부장)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특별조치법’을 지난달 말 발의했다. 상세 내용이 아직 공개되진 않았지만 그동안 산업계의 불만이 컸던 화학 관련 규제를 일부 완화하고 내년에만 2조 원대의 자금을 마련해 소부장을 키울 모양이다. 현장에서는 “목표는 같다. 하지만 원인 진단과 처방이 잘못됐다”는 지적이 여전하다.

원인 진단에 있어 정부여당과 산업계의 인식 차는 정말 크다. “지금까지 대기업이 국산화 의지가 부족했다는 의심을 갖고 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간사인 홍의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말 동아일보와 채널A가 주최한 ‘일본 수출규제 대응 전략 콘퍼런스’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정부여당이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대기업 책임론’에 대해 중소기업조차 “산업계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지적한다.

10년에 걸쳐 특수 소재를 연구개발해 최근 해외 유명 기업들에 납품을 시작한 한 중소기업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일본 미쓰비시사로부터 기계부품을 한 해에만 700억 원어치 사온다. 한국의 모든 산업에 일본의 소부장이 침투돼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간 대기업이 의도적으로 한국 중소기업을 배제한 게 아니라 70년이라는 산업화 기간 동안 우리나라의 전략이었다. 번듯한 산업이 별로 없었던 가난한 한국이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 이미 대를 이어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있는 일본을 활용해야 했던 것이다. 중소기업도 그렇게 일본 제품의 혜택을 입었다.”

‘이퀄 트리트먼트(Equal Treatment·동등대우원칙)’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한 대기업 출신 전직 관료는 “일본 제품을 사서 쓰는 게 싸고 생산 수율도 높인다는 측면이 있다. 여기다 한국 기업이 완제품을 대규모로 파니까 어느 정도는 일본 소재부품을 사줘야 한다는 이퀄 트리트먼트 측면도 있다. 셀러와 바이어가 힘의 균형이 맞아야 글로벌 분업이 유지된다. 대기업이라고 이 분업 구조가 깨질지 어떻게 예측했겠나”라고 했다.

원인 진단에서 이렇게 간극이 크다 보니 결론으로 나오는 처방에 대해서도 산업계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정부여당은 돈을 풀고 대기업을 압박하면 빠른 시일 안에 ‘소부장 자립’을 이룰 수 있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현장에선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대기업은 이미 너무 거대해져 작은 실수가 더 이상 작지 않게 됐다. 삼성전자의 올해 반도체 매출은 작년보다 20조 원이 줄어 63조 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불량률이 1%면 연간 6300억 원이 날아간다는 뜻이다. 일본만 만들고 우리는 못 만드는, 9가 12개 들어가는 99.9999999999% 고순도 불화수소를 써서 불량률을 0.0000000001%까지 떨어뜨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본 기업이라고 처음부터 9가 12개 들어가는 불화수소를 생산하는 기술은 없었을 것이다. 완제품을 생산하는 우리나라 반도체 대기업들과 호흡을 맞추며 처음엔 95짜리부터 시작해 차츰 99를 생산하게 되고 이후 소수점 9를 하나씩 늘리는 과정을 수십 년에 걸쳐 함께 밟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돈을 쏟아붓는다고 똑같은 제품을 갑자기 만들어낼 순 없다. 다행히 한국에도 이미 99.999를 생산하는 기업이 생겼으니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12개, 아니 기왕이면 20개까지 늘려 나갈 일이다.

그러니 요란스러워선 안 된다. 일본 제품을 안 사고, 일본에 관광 가지 않는다는 걸 ‘성과’로 내세워 일본과 끝까지 싸우자는 정서를 부추겨선 곤란하다. 그저 산업계가 대비할 수 있도록 돈, 규제 완화와 함께 시간을 주자. 진짜 무서운 사람은 그렇게 조용히 준비하는 사람이다.

하임숙 산업1부장 artemes@donga.com
#소재부품#대기업 책임론#산업계#불화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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