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부산과 인천에 초고층 건축인 마천루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마천루의 메카인 미국 뉴욕에서는 마천루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도달했을까. 또, 그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1913년 뉴욕시청 광장 앞에 하얀 울워스(Woolworth) 빌딩이 하늘을 향해 솟았다. 작은 소품을 팔아 세계적인 거부가 된 사업가 프랭크 울워스는 상품 진열과 전시에 귀재였는데, 이제 그는 마천루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했다. 뉴욕은 엘리베이터 발명으로 5층 높이에서 20층 높이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울워스는 57층의 마천루를 꿈꿨고, 이를 현실화했다. 당시 뉴욕에서 마천루의 높이는 곧 브랜드였다. TV나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이어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가 광고였다.
울워스 빌딩 첨탑(꼭대기)은 구름을 뚫고 솟았다. 새로운 세계였다. 시(詩)가 지면 위에서 문자로 보여줬던 세계를 건축이 물리적으로 눈앞에 펼쳐주니 이는 높이의 미학이었고, 다른 말로는 수직의 예술이었다. 울워스 빌딩은 뉴욕 초고층 마천루 경쟁에 방아쇠를 당겼다.
1915년 월스트리트 초입에 에퀴터블 빌딩이 섰다. 에퀴터블은 대지 경계선까지 건물을 꽉 채워 41층(162.2m)까지 솟았다. 그림자만 가득한 인공협곡이 생겨났다. 옆 건물에는 여름 낮 12시가 돼도 해가 안 들었다. 여론은 술렁였다. 마천루를 지을 때, 최소한의 형태 기준은 두자고 외쳤다. 이로 말미암아 1916년 마천루 일조권 사선 제한이라는 뉴욕 조닝법이 탄생했다. 법의 골자는 간단했다. 앞으로 짓는 모든 마천루는 위로 갈수록 부피를 감소할 것. 그래서 1920∼1960년대 뉴욕에 지어진 마천루들을 ‘웨딩케이크 마천루’라 부른다.
웨딩케이크 마천루의 백미는 크라이슬러 빌딩이었다. 1930년 자동차로 거부가 된 월터 크라이슬러 회장은 뉴욕에 초고층 마천루로 새 시대를 천명하고자 했다. 당시 뉴욕이 설정해 놓은 새로운 미지의 높이는 1000피트(약 300m)였다. 크라이슬러 빌딩은 맨해튼 은행 마천루와 높이 문제로 옥신각신하다 이겼다. 크라이슬러 빌딩은 314m나 치솟았다. 스웨덴 화강석의 저층부, 조지아주 백색 대리석의 몸통부, 니켈 크롬 아치의 머리부가 위로 갈수록 부피가 감소했다. 특히, 은빛 나는 아치는 위로 갈수록 7번 포개지며 솟았고, 그 위로 38m 높이의 철침이 치솟았다. 이는 육적인 상태에 놓인 건축이 영적인 상태가 되고자 보이는 수직적 몸부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승전으로 끝나자 뉴욕은 호황이었다. 1958년 시그램의 새뮤얼 브론프먼 회장은 근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데어로에를 위촉했다. 웨딩케이크 모양의 마천루가 반데어로에는 부담스러웠다. 미니멀하지 않았고, 순수해 보이지 않았다. 반데어로에는 시와 협의했다. 시는 대지 일부를 공공 플라자로 기부하면 마천루가 꺾임 없이 똑바로 서는 것을 허용해 주겠다고 했다. 시그램은 뉴욕 마천루 조닝법 개정을 유발했다. 반데어로에 이후 뉴욕에 너도나도 유리 박스형 마천루를 지었다. 반데어로에식 마천루를 사람들은 모더니즘 마천루라 불렀다. 미학적으로는 돌의 그림자가 아닌 유리의 투명을 붙들었다. 또 마천루의 꼭대기는 평평해졌다.
1968년 운동이 촉발한 탈근대 시대정신은 뉴욕 마천루 모습에도 영향을 끼쳤다. 역사주의 캠프와 혁신주의 캠프가 겨뤘는데, 결국은 후자가 득세했다. 후자를 대표하는 마천루가 휴 스터빈스의 시티코프(1976년) 마천루였다. 저층부에 기둥을 모서리에 두지 않고 입면 중앙에 두었다. 그 덕분에 길이 사방으로 트였다. 시티코프는 인도(人道) 레벨을 살리는 초고층 마천루로 남달랐다. 마천루의 머리 부분도 평평했던 모더니즘에 반기를 들고 대각선 처리를 해서 첨탑을 다시 뾰족하게 만들었다.
지난 100년간 뉴욕 마천루 역사는 우리에게 3가지 메시지를 던진다. 첫째, 마천루는 울워스와 크라이슬러처럼 도시의 하늘을 시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둘째, 마천루는 시그램과 시티코프처럼 땅의 흐름을 시로 승화시켜야 한다. 셋째, 마천루는 뉴욕 조닝법의 진화처럼 하늘을 앙망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경천애인’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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