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경찰이 철저히 감시하는 이집트, 민생고가 국민을 거리로 몰아
구심점과 대안 부재로 동력 상실… 이라크와 레바논도 민생고로 시위 중
4일 오후 10시(현지 시간) 이집트 카이로 도심에 있는 ‘아랍 민주화의 성지’ 타흐리르 광장으로 가는 길은 험했다. 카이로에 파견된 각국 외교관과 주재원의 대표적 거주지인 카이로 남쪽 마아디에서 차로 약 30분 걸리는 광장까지 이동하는 동안 기자가 탄 차는 3번이나 검문을 당했다.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경찰 검문은 까다로워졌다. 경찰은 차 안을 들여다보며 ‘도심 어디를 가냐’ ‘가려는 목적이 뭐냐’고 물었다. 20, 30대 현지인 남성들만 탄 차는 도로 바깥쪽에 차를 세우게 한 후 탑승자들을 차에서 내리게 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시위 때문이다. 2주 전(지난달 20, 21일)에 타흐리르 광장과 주변에서 6년 만에 수백 명 넘게 모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으니… 정부에서 엄청 긴장했다.”
기자를 타흐리르 광장으로 태워 준 이집트인 우버 기사는 수차례 “지금 이집트는 나라 전체가 혼란스럽고, 긴장한 상태”라고 강조했다. 그는 “시위 다음 주말인 지난달 27, 28일에는 경찰이 아예 도심 쪽으로 차들이 이동하는 것을 막다시피 했다. 지하철도 도심 주요 역에 정차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어렵게 도착한 타흐리르 광장 주변은 외견상 평소 주말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경찰이 좀 더 많아 보였지만, 식당과 카페는 대부분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흐리르 광장에서 200∼300m 정도 떨어진 골목에는 전투경찰들을 태운 차량들이 목격됐다. 데모 진압용 최루가스차(페퍼포그)도 대기하고 있었다. 일상복에 경찰 조끼를 입고, 무전기를 든 채 돌아다니는 경찰이 쉽게 눈에 띄었다.
도심에서 시위 취재를 하려면 “매우 조심하라”던 이집트인 지인의 충고가 떠올랐다.
“평소에도 경찰이 타흐리르 광장에서 사진 찍는 걸 막을 때가 있는 거 알지? 요즘 같은 시기에는 경찰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의심받을 수 있어. 여기는 한국이 아니야.”
○ 감시 사회에서 발생한 6년 만의 시위
군인 출신인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은 2013년 쿠데타를 통해 이집트 최초의 민간인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의 민선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시시 대통령이 집권한 뒤 이집트에서는 사실상 시위가 사라졌다. 그는 취임 직후부터 계속 비상사태를 유지했고, 법으로도 시위를 제한해 왔다.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2011년 중동에서 벌어진 ‘아랍의 봄’ 시기에 이집트를 30년간 철권 통치했던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을 끌어내린 시위가 일어났다. 2013년에는 무르시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군부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아랍 민주화의 성지라는 이곳도 지난 6년간은 조용했다. 실제 이집트에선 시위를 시도하는 것도 어렵다. 경찰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이집트 어디에서건 2, 3명이 한 조가 돼 오가는 경찰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많은 이집트인들은 “나라가 가난해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지 못하니 경찰의 눈을 통해 시위 같은 비상 상황을 감시하려는 의도”라고 꼬집는다.
시시 대통령의 핵심 정적인 무슬림형제단과 민주화 세력 등 반대파에 대한 ‘피의 숙청’도 시위를 펼치기 어렵게 만든 요인이다. 말 그대로 공포감 조성 효과가 크다. 국제인권단체들은 시시 대통령 취임 이후 이집트 법원이 무르시 지지자 1200여 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휴먼라이츠워치(HRW)와 이집트권리와자유위원회(ECRF) 등은 2017년 이집트 당국의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무분별한 체포와 고문 실태를 지적하는 보고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 문제는 민생고와 부패
이처럼 정치적으로 억압된 분위기에서 지난달 20일 늦은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등 주요 도시에서 반정부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는 건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시위대의 주된 구호도 ‘시시는 떠나라’였다. 이를 두고 이집트에선 “얼마나 서민들의 삶이 힘든지를 잘 보여줬다”는 말이 나온다. 민생고가 시위를 발생케 한 핵심 동력이라는 것.
실제로 국민 3명 중 1명이 하루 평균 1달러를 약간 웃도는 돈으로 생활하는 극빈층일 정도로 이집트 경제는 심각한 상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같은 아랍 산유국들과 달리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도 적다. 제조업 기반도 약하다. 관광산업은 2011년 이후 완전히 침체됐다. 여기에 재정 위기까지 겹쳐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2016년부터 올해까지 총 120억 달러(약 14조3500억 원)의 구제금융을 받고 있다. 현지인들은 “희망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특히 20, 30대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이집트 청년실업률은 지난해 32.6%를 기록했다. 명문 카이로대 졸업생 중에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이 수두룩하다. 카이로대 출신으로 대학원까지 마친 한 구직자는 “이집트 내 일자리가 워낙 적어 걸프 산유국 쪽에 알아보고 있는데, 이 나라들도 과거와 달리 자국민 중심으로 고용하는 상황이라 취업이 어렵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군부의 부정부패도 국민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많다. 스페인에서 망명 중인 모하메드 알리의 폭로가 미친 파장이 컸다. 이집트군과 15년간 거래해 온 건설업자인 알리는 시시 대통령과 군부가 국가적 경제난에도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호화 주택을 짓고 있다며 비난하는 내용 등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 시위가 지속되기는 힘들어
민생고와 부패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 만큼 향후 시위 발생의 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시위가 지속될 것에는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시시 대통령의 강경 대응이 주된 이유다. 이집트 정부는 지난달 20, 21일 발생한 시위 뒤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대규모 체포 작전을 펼치고 있다. 현지 시민단체들은 2000명 이상 체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과 통신 기능도 떨어뜨렸다. 정부에 비판적인 국민들이 SNS에 활발하게 의견을 올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BBC방송과 미들이스트아이(MEE) 같은 비판적인 언론의 인터넷 사이트도 차단됐다. 한 외교 소식통은 “며칠 전 열린 외교 행사 때 ‘인터넷 속도’가 각국 외교관의 주된 화제였다”고 전했다.
시위를 이끌고 있는 강력한 지도자나 단체가 없다는 것도 지속적인 동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무슬림형제단 등 반정부 단체도 아직은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현실 정치에 대한 비관도 크다. 또 다른 소식통은 “현실적으로 시시 대통령 정도로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 사람을 찾는 건 어렵다는 여론도 상당하다”고 말했다.
○ 이라크와 레바논도 시위로 시끌
변수는 있다. 이라크와 레바논에서도 이집트처럼 경제난과 부정부패에 불만을 품은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최근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2011년 아랍의 봄 사태처럼 중동 전체에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는 상황이 조성될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이달 이라크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면서 1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슬람교 수니파 극단주의를 추종하는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을 거치며 경제 파탄에 이르자 불만을 가진 청년들이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당초 평화롭게 진행됐던 시위는 이라크 당국이 실탄 사격을 가하며 폭력적으로 변했다.
‘중동의 파리’로 불리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도 지난달 말부터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국가 부채가 860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150%를 넘는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GDP 대비 부채비율이다. 레바논 파운드화의 가치도 계속 폭락해 최근 2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각에선 역시 심각한 경제난 속에 대선을 치르고 있는 튀니지 등에서도 다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해 정국이 불안해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CNN은 최근의 중동 상황을 두고 시위대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1992년 대선 슬로건처럼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를 외친다고 전했다. 민생고가 중동 국가 국민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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