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경기 파주시의 한 돼지농장에서 국내에선 처음으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하자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일부다. ASF가 확산되면 국내 돼지가 절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국내 방역체계를 고려하면 ASF로 국내 돼지가 절멸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다수 전문가의 판단이다. 하지만 ASF의 특성상 백신과 치료약이 없어 한 번 퍼지면 뿌리 뽑기 힘들다는 점을 경고했다는 점에서 그냥 흘려듣기가 어렵다.
실제로 국내 가축전염병은 토착화, 만성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구제역은 2014년부터 6년째 거르지 않고 해마다 찾아왔다. 조류인플루엔자(AI)는 지난겨울 발병 없이 넘어갔지만 2003년 이후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돼 안심할 수 없다. ASF의 경우 2일 비무장지대(DMZ)에서 발견된 멧돼지 사체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되면서 토착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농가의 사육용 돼지에서 발병하는 ASF는 도살처분을 통해 어느 정도 확산을 저지할 수 있지만 야생 멧돼지는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ASF에 구제역과 고병원성 AI가 겹치는 ‘다중복합 전염병’까지 걱정해야 할 상황이라는 말도 나온다. 십수 년째 반복돼 온 구제역과 AI를 통해 만성화하는 가축전염병의 실태와 해결책을 살펴봤다.
○ 6년 연속 발병으로 사실상 토착화한 구제역
수의학계에서는 구제역이 2010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토착화됐다고 보고 있다. 정부는 최악의 구제역 사태로 기억되는 2010∼2011년 발병을 계기로 2011년 1월 전국적인 상시 백신 접종 정책을 도입했다. 백신 처방 덕분에 그 이후에는 2010년처럼 큰 파동을 겪지는 않았지만 연중 산발적인 발병은 계속 이어졌다. 정부는 ‘2014∼2016 구제역 백서’에서 이전 사례와 달리 2016년 구제역은 국내 잔존 바이러스로 발병했다고 추정했다. 외부 유입 때문이 아닌 토착화한 바이러스에 의한 발병이라는 것이다.
기록상 한국 최초의 구제역은 1911년 발병했다. 이때부터 1934년까지 총 23차례 나타난 것으로 돼 있다. 이후 자취를 감췄다가 2000년 3월 24일∼4월 15일, 2002년 5월 2일∼6월 23일 각각 15건, 16건 발생했다. 추가 확산 방지에 성공한 덕분에 2002년 11월 한국은 구제역 청정국 지위를 회복했다.
하지만 8년 만에 최악의 구제역 사태가 터졌다. 2010년 11월 28일부터 2011년 4월 21일까지 소, 돼지, 염소 등에서 구제역이 창궐했다. 이때 도살 처분된 가축만 347만9962마리에 이른다. 이때부터 소, 돼지 등 우제류에 구제역 백신 접종을 시작해 한국은 세계동물보건기구(OIE) 상의 백신 미접종 청정국 지위를 잃게 됐다. 2014년 5월에야 겨우 백신 청정국이 됐다. 하지만 그해 7월 다시 발병해 6년째 발병국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 언제 변종 창궐할지 모르는 AI
고병원성 AI는 2003년 말 국내에서 처음 발병한 뒤 거의 매년 발생했다. 국내 AI 발생 횟수는 연도별로 분류하면 크게 7차례다. 가장 심각했던 건 2016년 3월부터 2017년 6월 19일 사이 세 번에 걸쳐 발생했을 때다. 이 시기 전국 62개 시군에서 총 421건의 양성 판정이 나왔다. 도살 처분된 닭, 오리 등 가금류도 3807만6000마리로 가장 많았다. 도살 처분과 생계소득 지원 등에 총 3621억 원이 쓰였다.
대부분 외부 오염원 유입을 차단할 시설 부족, 철새 등 야생 조류나 축산 차량에 의한 오염원 유입 등으로 추정된다. 특히 산란계는 기업형 농장에서 밀집 사육되는 데다 계란 수집을 위한 농장 내 차량 출입이 빈번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AI 감염에 더 취약하다. 기존 발생지에서 재발하는 확률이 높기 때문에 정부가 AI중점방역관리지구를 513개 읍면동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2017년 AI 발병 농가는 중점방역관리지구에 집중됐다.
지난겨울에는 AI가 단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다. 정부는 역대 최악이었던 2016∼2017년 AI 사태 이후 오리 사육 휴지기 등 고강도 방역대책을 내놨다. 오리 사육 휴지기는 AI 감염 경로가 주로 철새→오리→닭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감안해 겨울철 오리 사육을 금지하는 대신 보상금을 주는 제도다. 모인필 충북대 수의학과 교수는 “초기 AI 발생 때는 신속한 도살 처분이 이뤄지지 않는 등 방역에 허점이 많았지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오리 사육 휴지기, 즉각적인 일시이동중지 명령 조치 등을 도입한 덕분에 최근 들어서는 발병 사례가 크게 줄었다”고 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요즘엔 겨울과 봄이 아닌 여름에도 AI가 발병하면서 연중 상시화하는 패턴을 보이고 있어서다. AI 역시 토착 질병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AI 바이러스는 고온과 습도에 약해 겨울과 봄에 확산되다 날씨가 더워지면 자연스레 기세가 꺾였다. 2014년 처음 ‘여름 AI’가 발생하면서 이 법칙이 깨졌다. 2017년 6월에도 전북 군산시의 한 농장에서 시작된 AI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전문가들은 철새를 통해 유입되는 것으로 알려졌던 AI가 변이 과정을 거쳐 국내에 잠복해 있다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AI 바이러스는 변이를 잘 일으키기 때문에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가 생기면 대대적으로 창궐할 가능성이 크다.
○ 방역체계 개선과 농가 협조 병행돼야
한국의 가축 질병 방역체계는 구제역과 AI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개선돼 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다만 초기 대응 실패로 토착화를 막기 위한 ‘골든타임’을 놓친 탓에 고질적인 재발 구조가 형성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염병 발병 초창기에는 농가들의 강력한 저항 탓에 신속하게 도살 처분이 이뤄지지 못했고, 일시이동중지 명령도 곧바로 시행되지 않았다. 구제역은 품질이 떨어지는 백신을 써서 예방에 실패한 사례도 있었다.
해외에서 바이러스가 유입될 통로가 늘어난 점은 가축전염병의 완벽한 퇴치를 더욱 어렵게 한다. 전문가들은 특히 한국보다 방역 수준이 떨어져 주기적으로 가축전염병이 창궐하는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게 취약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보고 있다. 이번 ASF 역시 중국에서 북한을 거쳐 국내로 유입됐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주로 철새의 이동으로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AI는 중국 내 변종이 너무 많아 종류를 특정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농가에 외국인 근로자가 늘면서 이들이 자국을 오가거나 근로자끼리 교류하면서 바이러스를 옮길 위험도 커졌다.
현장에서 직접 방역작업을 수행하는 지방자체단체의 방역 능력이 상대적으로 미흡하다는 것도 문제다. 일부 전문가는 농림축산검역본부가 지자체 방역 전문 인력을 직접 관리하거나 아예 중앙과 지방의 방역기관을 일원화하는 등의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열악한 방역 환경 탓에 전문 인력의 이탈이 많은 것도 풀어야 할 숙제다.
전문가들은 초기 방역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농가의 적극적인 협조라고 강조한다. 김재홍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국가 방역시스템이 아무리 뛰어나도 농장 주인들이 발병 사실을 숨기거나 방역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역인력과 농가가 직접 소통하며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제역 백신 미접종 청정국인 일본은 지자체의 방역 공무원 1명당 농가 15곳을 배정해 평소에도 소통하고 예찰하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 우리는 발병이 확인되면 방역인력이 투입되는 구조다. 김 교수는 한국도 일본과 같은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도살 처분 농가에 대한 보상과 지원도 충분히 이뤄져야 한다. ASF 발병 농가 인근 지역에서는 지금도 강제 도살 처분 조치에 대한 반발이 적지 않다. 서정향 건국대 수의학과 교수는 “ASF로 돼지가 도살 처분되면 2, 3년간 재입식이 어려운데 생활안정자금 지원은 6개월뿐”이라며 “생계 문제로 농가에서 신고를 꺼리게 되면 ASF 확산을 막기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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