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約江湖晩(유약강호만) 강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지 오래되지만/紅塵已十年(홍진이십년) 어지러운 세상에서 지낸 것이 벌써 10년이네/白鷗如有意(백구여유의) 갈매기는 그 뜻을 잊지 않은 듯/故故近樓前(고고근루전) 기웃기웃 누각 앞으로 다가오는구나”
임진왜란 발발 13년이 지난 1605년. 승병장으로 활약한 사명대사(법명 유정·惟政·1544∼1610)가 강화와 포로 송환 협상을 위해 종전 뒤 일본에 갔을 때 남긴 한시다. 일본의 사찰이 보관하던 사명대사의 유묵 5점이 약 400년 만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BTN불교TV와 공동 기획해 ‘일본 교토 고쇼지(興聖寺) 소장 사명대사 유묵’을 15일부터 11월 17일까지 서울 용산구 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 특별 공개한다. 불교TV가 지난해 사명대사 다큐멘터리 촬영차 일본 취재 중에 그 존재를 파악한 유묵들이다.
사명대사는 전란 뒤 조일 양국의 평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한 외교가였다. 1604년 선조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이듬해 교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을 지어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그가 도술로 일본인의 기세를 꺾었다는 야담이 다수 전해지지만 이번 유묵은 실제 활동 흔적으로 주목된다.
사명대사는 초서에 빼어난 서예가이기도 했다. 유묵 ‘有約江湖晩(유약강호만)…’에서도 그런 면모가 뚜렷이 드러난다. 사진으로 이 유묵을 본 서예가 김병기 전북대 교수는 “필법 면에서도 그 어떤 서예가 못지않고, 서품의 격조 면에서도 고도의 문인정신이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한시에는 전란 속에서도 구도자(求道者)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은 그의 내면이 드러난다. 사명대사는 선조가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퇴속(退俗)할 것을 권했지만 거절했다. 유새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옛 글에서 갈매기는 은둔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종종 쓰였다”며 “일본에서의 임무를 잘 마무리한 뒤 속세를 정리하고 선승(禪僧)의 본분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畵角聲中朝暮浪(화각성중조모랑) 나팔 소리 들리고 아침저녁으로 물결 일렁이는데/靑山影裏古今人(청산영리고금인) 청산의 그림자 속을 지나간 이 예나 지금 몇이나 될까”
신라 말 문장가 최치원(857∼?)의 시 ‘윤주 자화사 상방에 올라’ 가운데 두 구절을 적은 사명대사의 유묵 내용이다. 고쇼지의 분위기가 탈속적이라는 뜻을 담아 시구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사명대사가 고쇼지를 창건한 엔니 료젠(円耳了然·1559∼1619)에게 ‘虛應(허응)’이라는 도호(道號)를 지어 주며 써준 글씨와 편지, 고쇼지에 소장된 중국 남송의 승려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의 전서(篆書)를 보고 감상을 적은 글이 사명대사의 진영(동국대 박물관 소장)과 함께 전시된다. 엔니가 선종의 기본 개념과 임제종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10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정리한 글 ‘자순불법록(諮詢佛法錄)’도 있다. 엔니는 자신이 이해한 내용이 옳은지 사명대사에게 이 글을 보이고 가르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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