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별일을 다 봤지만, 한국 축구대표팀이 북한에 들어가 연락 두절된 이번 사건은 정말 황당했다. 21세기엔 달나라에 간다 해도 연락이 두절되는 일은 없을 텐데, 서울에서 불과 몇 시간 떨어진 평양에서 스타들로 구성된 국가대표팀 실종 사건이 벌어졌고, 우린 속수무책이었다.
언론들은 ‘북한 당국’이 냉대를 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당국이 아니라 정확하게 김정은이 지시한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김정은의 허락 없이 무관중 경기를 진행하고 한국 대표팀의 통신을 차단하며 생중계 불허, 기자단과 응원단 입국 금지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당연히 없다. 그랬다가는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살아남기 어려운 사회가 북한이라는 것쯤은 우린 당연한 상식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왜 굳이 이런 속 좁은 행동을 한 것일까. 북한 축구의 객관적 전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인민들에게 패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북한은 13일 전국적으로 체육절 70주년 행사를 열고 김 씨 일가의 영도로 북한 체육이 세계 강국으로 우뚝 섰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런데 불과 이틀 뒤 대표적인 스포츠 종목인 축구에서, 그것도 김일성의 이름이 붙은 경기장에서 남쪽에 패한다면 큰 망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관중 경기는 북한 내부 사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해도, 한국의 생중계와 취재진 입국까지 봉쇄한 이유는 뭘까. 나는 김정은이 이번에 일부러 찬바람을 쌩쌩 일으켜 한국 사회, 더 구체적으론 문재인 대통령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고 생각한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꿈 깨”쯤 되겠다.
최근 몇 달간의 북한 언론을 분석해보면 김정은의 불만이 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기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문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북한을 계속 활용하고 있는 데 화가 난 것이다. 떡 줄 생각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닌데 문 대통령은 북한과 함께해야 할 거창한 꿈을 매달 빠짐없이 발표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문 대통령은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일 경제전쟁을 극복할 카드로 ‘남북 평화경제’를 꺼내들었다. 이튿날 북한은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다”며 조롱했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유엔 연설에서 ‘비무장지대(DMZ) 국제평화지대화’ 구상을 제안했다. DMZ를 남북이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판문점과 개성을 잇는 지역을 평화협력지구로 지정해 DMZ 지뢰 제거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달 초엔 남북 올림픽 공동개최를 추진하겠다고도 했다. 이에 북한의 대외용 인터넷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8일 “세치 혓바닥 장난으로 세상을 기만하지 말라”고 맹비난했다.
김정은의 심정은 이해가 된다. 핵을 들고 비장한 각오로 흥정하러 나왔는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브로맨스만 강조하며 북한에 엄청난 기회가 있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말밖에 하지 않았다. 북한이 하나하나씩 약속받고 싶은 것들은 따로 있는데, 재선을 의식한 트럼프 대통령은 도무지 진도를 나가려 하지 않고 있다. 대북 제재로 피 마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김정은으로선 미국을 어떻게 다시 회담장으로 끌어올지 그것만 생각하기에도 골치가 아플 것이다.
이런 답답한 상황인데 김정은이 볼 땐 힘이 없어 운전석에서 밀어내려는 문 대통령까지 북한에 숟가락을 얹고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뜬금없는 제안을 계속 내놓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 법하다.
지금 김정은은 문 대통령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을 것이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조차 미국 눈치 보느라 못 열면서 누구 맘대로 우리 땅에 국제평화지대를 만들겠다고 하나. 핵 폐기를 왜 남쪽이 공언하며 평화경제를 운운하나. 임기는 빠르게 가는데 작년 판문점과 평양에서 속삭였던 달콤한 약속들 가운데 뭘 지켰나. 내가 11월에 부산에 갈 가능성이 있다고?”
이런 와중에 하필 한국 축구대표팀이 평양에 가게 되면서 무관중 경기가 열리게 된 셈이다. ‘시어미 역정에 개 옆구리 찬다’는 속담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손흥민이 엉뚱하게 옆구리를 차여서 나도 괜스레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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