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은 정말 놀랍다. 별로 두껍진 않지만 빽빽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소설은, 뭐라 덧붙이기가 머뭇거려진다. 원작 자체가 그런 건지 번역이 의도한 건지 모르겠는데, 극도로 쉼표를 자제한 만연체 문장은 숨이 가쁘다. 아니, 잘금잘금 읽는 이의 호흡을 앗아간다. 그러곤 작가만의 템포에 길들이더니 그대로 폭탄을 투척한다. 와우.
1970년대 북아일랜드가 배경인 ‘밀크맨’을 굳이 초창기 랩에 비교한 이유는 또 있다. 날이 제대로 섰기 때문이다. IRA(아일랜드공화국군)가 곧장 떠오르는 북아일랜드 독립운동이 첨예하던 시절. 그런데 막상 소설은 영국이니 뭐니 구체적 단어는 전혀 쓰지 않은 채, ‘우리’ ‘저들’ ‘길 이쪽’ ‘저 너머’ 등의 표현만으로 당시의 무지막지한 분위기를 생생하게 담았다.
게다가 더 중요한 건, 이 소설이 억압과 차별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단 점이다. 18세 여성 주인공 주위를 언젠가부터 ‘밀크맨’으로 불리는 중년 남성이 맴돈다. 우유배달부라 불리지만, 그는 저항군에서 상당한 지위를 갖고 있는 ‘이쪽’의 권력자. 게다가 때는 여성 인권에 무지하던 시절. 접촉만 없었을 뿐, 자신을 물건처럼 소유하려는 밀크맨과 그를 당연한 듯 용인하는 사회 앞에서 주인공은 피폐해져 간다.
실은 그래서인지 ‘밀크맨’은 정독이 꽤나 만만찮다. 화법 자체가 책 3분의 1쯤 지나서야 겨우 적응이 될랑 말랑한데, 주인공의 미묘한 감정을 온전히 따라잡기 쉽지 않았다. ‘성 인지 감수성’이 떨어져서 그런가 하는 자책감마저 생겼다. 먼저 소설을 읽은 여성 유명인사들은 극찬을 쏟아냈던데, 괜히 주눅도 들었다.
그런 몇몇 난관에도 ‘밀크맨’은 너무나 읽는 재미가 강력하다. 개인적으로 ‘언더그라운드’(1995년)를 연출한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의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착시가 일었다. 깊고 무거운 주제를 이토록 리듬감 있게 풀어낼 수 있다니. 지난해 ‘맨부커상’ 수상작이란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놓치면 두고두고 아쉬울 ‘어쩌면-올해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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