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76화> 함남 원산·함흥
1919년 경성에서 3·1운동이 시작된 날 동해안에 위치한 함경남도 원산(현 강원도)에서도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조선헌병사령부와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가 작성한 ‘조선소요사건경과개람표’(1919년 3월 1∼31일)에 따르면 이날 원산은 경성(4000명) 다음으로 많은 인원인 2500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같은 북한 지역인 평양(1800명)이나 의주(1200명)보다도 많은 수치다. 일제는 3월 1일에 전국적으로 9930명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축소 보고했지만 경성과 원산 등 각지의 시위참가자 수는 훨씬 많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동해안에서 두 번째로 많은 참가자를 기록한 원산 만세운동은 단순히 반일 감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 거사 하루 전 날아든 ‘청어 상’ 전보
동북지역 제일의 무역항이던 원산은 항일(抗日) 의식이 남다른 곳이었다. 이를 주도한 이들은 원산 남촌동 교회 정춘수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계 인사들이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정춘수는 1919년 1월 경성에서 기독교 목사 오화영, 신석구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했다. 이어 2월 20일 서대문의 영신학교에서 이승훈 박희도 오화영 등과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검토한다. 오화영이 거사 계획이 확정되는 대로 통지해주기로 하자, 정춘수는 원산으로 돌아간다.
2월 23일 오화영의 편지가 정춘수에게 전달됐다. “거사일은 3월 1일이며 주동은 기독교 천도교 불교가 함께 맡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정춘수는 시일이 촉박한 데다 다른 종교단체와 손잡는 것이 마음에 걸리자 사정을 알아보도록 전도사 곽명리를 경성으로 보낸다.
거사 하루 전인 2월 28일. 아침까지도 경성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고, 거사의 핵심인 독립선언서도 도착하지 않자 정춘수는 장로 차준승을 다시 경성으로 보낸다. 이때 일제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암호를 정해 소식을 주고받기로 한다. 3월 1일의 거사가 확실하면 청어 값이 올랐다는 뜻인 ‘청어 상(上)’을, 거사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청어 값이 떨어졌다는 뜻의 ‘청어 하’를 전보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독립선언서가 늦게 도착할 것에 대비해 스스로 제작한 독립선언서 2000여 장도 따로 인쇄한다.
다행히 이날 오후 경성에서 소식이 날아든다. 오화영을 만나고 원산에 돌아온 곽명리가 “원산의 거사는 3월 1일 오후 2시에 하라”는 내용을 보고한 것이다. 그는 독립선언서 300여 장도 함께 가지고 왔다. 비슷한 시각 차준승도 ‘청어 상’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이에 정춘수는 당초 계획대로 3월 1일 만세시위를 하기로 정하고 동지들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태극기 제작에 돌입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 학생들이 선두에서 북 치고 나팔 불고
3월 1일은 원산 장날이었다. 거사 시각인 오후 2시, 여러 교회에서 일제히 종소리가 울렸다. 주동자 13명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장촌동 시장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고물상 오경달에게서 북과 나팔을 받은 학생들은 악기를 연주하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일본인 거주촌을 거쳐 원산경찰서로 향했다. 시위대 규모에 놀란 일제는 경찰과 헌병, 소방대를 동원했다. 소방대원들은 시위대 참석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물감을 탄 물을 뿌렸지만 시위대는 굴하지 않고 전진을 계속했다. 공포탄을 쏴도 잠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이날 시위는 오후 6시경 끝났다. 일제 군경은 이튿날부터 옷에 물감이 밴 사람들을 잡아들이며 본격적인 체포작업에 나선다. 당시 시위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이진구는 ‘신동아’ 1965년 3월 기고에서 “시장에서 장꾼과 합세한 1만여 명은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에 나섰다”며 “일제 헌병들이 공포를 쐈지만 군중들은 일부 해산하면서 다시 역전으로 몰려들어 다시 한번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다”고 전했다.
이후 원산에선 3월 18일 1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와 4월 5일 김진수와 황종성이 주도한 철시(撤市) 시위 등이 이어졌다.
한편 원산 3·1운동을 주도한 정춘수는 시위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정세를 살피고 선·후책을 강구하기 위해 곽명리 이가순 등에게 의거를 부탁한 뒤 거사일 아침 경성으로 떠났다. 3월 1일 밤 경성에 도착한 정춘수는 3월 7일 경무총감부를 찾아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수감됐다. 그는 독립선언서 33인 대표 명단에 이름이 올려져 있었기 때문에 체포를 피할 순 없었다.
정춘수는 훗날 변절해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는 수모를 겪었다. 고향인 청주 3·1공원에 세워졌던 그의 동상도 철거됐다.
○ 기독교계와 학생 두 갈래로 계획된 함흥 시위
원산 만세운동 지도부는 거사 논의 초기 단계부터 함남의 중심 도시인 함흥을 동참시키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청어 상’ 전보가 원산에 날아든 2월 28일, 원산 광석동 교회 장로 이순영은 한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함흥으로 떠났다. 독립선언서와 시위 계획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소식을 접한 함흥지역 시위계획자들은 장날인 3월 3일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인쇄 등 만반의 준비를 해나갔다. 이와 별도로 함흥고등보통학교와 함흥농업학교, 영생중학교 3·4학년 학생으로 구성된 함산학우회도 보성전문학교 학생대표가 보낸 독립선언서를 받은 뒤 3월 3일 거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기독교계나 학생들의 움직임과는 상관없는 산발적인 시위가 3월 2일 함흥시내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 시위로 300여 명을 체포한 일제 경찰은 3월 3일 새벽 함흥의 모든 시내에서 대규모 예비 검속을 벌여 기독교계와 학생시위 주동자들까지도 체포했다.(‘함흥시지’)
함흥경찰서에 갇힌 조영신 이근재 한태연 등은 경찰에 맞으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특히 조영신은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만세를 불렀다. 일제 경찰은 그에게 중단하라고 제지해도 말을 듣지 않자 칼로 그의 입을 찢어버렸다. 하지만 조영신은 피를 흘리면서도 만세를 멈추지 않았다. 이를 본 많은 수감자들은 경찰서 유치장이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경찰서 밖에서 수감자들의 만세소리를 들은 시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독립운동사’)
이를 계기로 무산될 뻔한 함흥 시위는 다시 살아났다. 장로 이명봉이 서문거리 모퉁이집 지붕 위에 올라가 큰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고, 김치선이 독립선언서를 나눠줬다. 함흥 시위에 참가했던 목사 김중석은 ‘신동아’ 1965년 3월호 기고에서 “애초에 계획하기로는 낙민루재에서 나팔소리가 나면 시장 복판인 서문거리 모퉁이집 지붕 위에 올라가 만세를 선창하기로 약속돼 있었다”고 소개했다.
시장 부근에 나와 있던 영생중학교·함흥농업학교·함흥고등보통학교·영생여학교 학생과 시민 1000여 명도 만세를 부르며 거리 행진에 나섰다. 일제 경찰은 헌병과 소방대의 지원을 받아 총칼과 (화재 진압용) 쇠갈고리를 휘두르며 시위 진압을 벌인다. 이를 목격한 캐나다 북장로파 선교사 덩컨 맥레(사진)는 일경에게 “학생들의 머리에 불이 붙었느냐. 왜 쇠갈고리를 학생들 머리에 휘두르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맥레는 경찰서장을 찾아가 항의했고, 함흥에서 자행된 일제의 잔학상을 경성의 영국 총영사에게 알리기도 했다.
▼ “美의원단에 독립의지 보여주자” 본보 원산지국서 회합 ▼
경성 방문 맞춰 만세시위 계획
원산 애국지사들은 3월 1일 만세시위를 계획하며 독립이 이뤄질 때까지 노력하기로 약속한다. 1920년 9월 원산 2차 의거의 주역 중 한 명으로 당시 동아일보 원산 주재 통신원이었던 김상익(사진·건국훈장 애족장)은 ‘신동아’ 1965년 3월호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원산에서는 3·1만세운동을 당년(그해)에 끝내지 않고 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해마다 계속하기로 3·1운동 당시 동지 간에 묵계가 있었다.”
원산 2차 의거는 3·1운동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김장석이 1920년 4월 함흥감옥에서 풀려나면서 본격화된다. 주동자들은 1920년 여름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일제가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식민통치에 승복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미국 의원단을 한국에 초청한 것이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일제 판결문과 ‘원산시사’에 따르면 주동자들은 미국 의원단이 경성을 방문하는 8월 24일에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조선 민족이 총독부에 반항하고 독립에 대한 희망이 맹렬하다는 것을 미국 의원단에 보여주자는 취지였다. 시위 주동자들은 동아일보 원산지국을 회합 장소로 활용했다. 먼저 김상익과 이용훤 등은 ‘상해임시정부 결사대 일행’ 명의로 전단을 작성했다. “한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미국 국회의원을 환영하라. 전 시가는 철시하고 친일파는 살육하라. 친일파의 재산은 몰수·소각하며 일본 상품의 판매를 금지하고 관공서는 파괴하라”는 내용이었다. 주동자들은 이를 대량 인쇄한 뒤 원산시내에 배포했다. 김상익은 아예 경성으로 올라가 각계 주요 인사에게 전단을 전달했다.
원산 시위 준비는 착실하게 진행됐지만 강화된 일제의 감시 탓에 거사일은 9월 23일로 늦춰졌다. 거사 당일 오후까지도 원산은 조용했다. 그날 밤 최종현 등 주동자들은 시위 준비가 뜻대로 되지 않아 속을 태우며 남산교 부근을 걸었다.
그때 저녁 달빛을 감상하러 나온 많은 시민들이 눈에 띄자 최종현 등은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어 시민 수백 명이 만세 행진에 동참했고, 원산보광학교와 원산공립보통학교 학생 600여 명도 가세했다. 기세가 살아난 시위대는 시내로 진출해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우체국, 파출소 등을 습격하고 일본인 집에 돌을 던졌다. 뒤늦게 시위 진압에 나선 일제 경찰의 발포로 학생 2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40명이 체포돼 33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원산 애국지사들은 옥중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21년 1월 17일 동료들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남상빈이 우스갯소리를 하자 감방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를 자신에 대한 비웃음으로 착각한 일본인 간수가 남상빈의 옷을 벗기고 꿇어앉힌 뒤 얼음물을 퍼부었다. 이에 김상익이 “이놈들아, 우리 민족이 다 죽은 줄 아느냐”고 호통쳤다. 수감자들은 통곡했고 통곡은 곧 우렁찬 만세소리로 바뀌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형무소장이 간수의 행위에 대해 사과했다.(‘독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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