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후 25년간 유지해 왔던 농업 부문의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농민을 달래기 위한 대책에 필요한 재원을 기업 출연금으로 채우겠다고 밝히며 정책 결정에 따른 피해 보상을 기업 부담으로 전가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25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고 개도국 지위를 공식 포기했다. 홍 부총리는 “최근 WTO 내에서 선진국뿐 아니라 개도국들도 우리의 특혜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 향후 WTO 협상에서 인정해 줄 가능성이 거의 없다”며 “당장 농업 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없으며 미래 협상에 대비할 시간과 여력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현재의 관세와 보조금 혜택은 유지하지만 향후 WTO 농업 관련 협상이 열리면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 향후 WTO협상서 관세-보조금 혜택 줄어들듯 ▼
정부, 개도국 지위 포기 선언
농민들 정부 청사 찾아가 “철회하라”
한국은 1995년 WTO 가입 시 개도국임을 주장했지만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계기로 농업과 기후변화 외에는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농업 부문에서 선진국이 이행해야 하는 관세와 보조금 감축 의무의 3분의 2만 부담해 왔고, 이에 따라 연간 1조4900억 원의 농업 보조금을 농가소득 보전에 사용할 수 있었다.
이날 오전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33개 단체는 회의가 열린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로 진입하려다 경찰과 충돌하는 등 농민의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들은 “한국 농업을 미국 손아귀에 갖다 바치겠다는 것”이라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정부는 개도국 지위 포기에 따른 농민들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2조2000억 원의 예산을 배정해 공익형 직불제를 추진하는 등 소득 안정 방안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월 최대 100만 원씩 주는 청년영농정착지원금 확대, 농업인 재해복구비 지원단가 인상, 공공임대용 농지 매입단가 인상 등 현금 보상이 대책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앞으로 있을 WTO 협상에서 관세 인하 등으로 농가에 직접 피해가 갈 가능성에 대해선 “향후 협상에서 유연성을 갖고 최대한 보호하겠다”며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
이 같은 현금 보상안의 재원은 예산과 농어촌상생기금으로 채울 계획이다. 정부는 내년 농업 예산을 올해보다 4.4% 인상한 15조3000억 원으로 편성했다. 2015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 당시 농민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마련한 농어촌상생기금도 확대한다. 농어촌상생기금은 매년 1000억 원씩 1조 원을 목표로 조성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669억 원이 모이는 데 그쳤다.
정부는 기금을 확대하기 위해 기업 출연에 대한 인센티브를 늘릴 방침이다. 동반성장 평가에 기금 실적 반영 비율을 높이거나 정부 포상을 확대하는 식이다. 정부는 ‘유인책’이라고 설명하지만 정부가 일일이 기금 실적을 평가하는 상황에서 기업으로선 ‘압박’으로 느낄 여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국정농단 사건 당시 정부 요구로 기부금을 냈다가 총수 일가가 옥살이까지 한 상황에서 또 출연을 하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며 “정부가 마련해야 하는 농민 대책을 민간에 떠넘기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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