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눈치를 봐라[오늘과 내일/문권모]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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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원천인 공감능력, 디지털 시대에 더 중요해져

문권모 채널A콘텐츠편성전략팀장
문권모 채널A콘텐츠편성전략팀장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10여 년 전 고 에드워드 김(김희중) 선생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올해 초 돌아가신 선생은 동양인 최초로 미국 다큐멘터리 잡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편집장을 지냈다. 기자로 활동하던 1973년엔 서방 언론 최초로 북한을 취재해 이듬해 미국 해외기자단 최우수 취재상을 받았다. 재미교포가 아닌 토종 한국인으로선 대단한 업적이었다. 그는 감각적이고 호소력 있는 사진과 글로 세계적 명성을 쌓았다.

강의 당시에도 지병이 있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두 눈은 내내 반짝거렸다. 침묵이 이어지자 선생이 앞줄에 앉은 몇 사람에게 답을 아느냐고 물었다. 대답이 신통치 않았다. 좌중을 둘러본 선생이 내놓은 말은 사실 매우 의외였다. “나는 사진을 가까이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그런 아름다움을 담은 이 사진을, 이 글을 꼭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야 좋은 사진과 글이 나옵니다.”

나는 그때 일종의 개안(開眼)을 했던 것 같다. 콘텐츠를 향유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들과 공감해야 비로소 좋은 콘텐츠가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공감능력이 상상력과 창의성의 기반이란 점은 생각 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창의성이란 자폐적인 천재의 번뜩이는 두뇌 속에서 탄생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신경세포 속엔 거울뉴런(mirror neuron)이란 것이 있다. 그 덕에 우리의 뇌는 다른 사람의 기분을 거울처럼 흉내 내 타인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고 공감한다. 거울뉴런이 발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떤 것에 어떻게 반응할지도 잘 예측한다.

이런 사람들이 남들의 공감을 얻는 히트작을 잘 만든다는 건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하다. 공감능력은 타인의 내면을 유추하게 하고, 이것이 발달하면 상상력이 된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쓴 조앤 K 롤링도 “상상력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성경에 나오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란 구절 역시 공감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간혹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창작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재주는 곧 바닥을 드러낸다. 남과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통찰력 있는 작품을 계속 만들어 낼 수 없다.

공감능력은 요즘 들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지금 미디어 업계는 기존 플랫폼을 넘어 디지털 공간에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변곡점에 서 있다. 그런데 디지털 콘텐츠는 기존 플랫폼과 다른 문법을 가지고 만들어야 한다. TV에선 일단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송한 후 사후적으로 시청률 등 시청자의 피드백을 받는다. 하지만 유튜브 같은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시청자의 의견을 거의 실시간으로 받고 반영해야 한다. 이런 환경에선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생각에 대한 공감능력이 높고 그들의 반응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밖에 없다.

좋은 창작물을 만들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공감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수시로 점검해 봐야 한다. 적극적으로 남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문화심리학자인 김정운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이 예전에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이 생각난다. 그는 ‘입꼬리가 처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인간은 타인의 긍정적 정서에 공감할 때 웃으며 볼 근육을 움직이는데, 스스로 ‘존귀와 위엄’을 갖추려는 권위적인 사람들은 볼 근육이 움직이지 못하게 입꼬리를 힘줘 내리기 때문이다.

심금을 울리는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가. 그럼 당장 거울 앞에 서 보라. 당신의 입꼬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문권모 채널A콘텐츠편성전략팀장 mikemoon@donga.com
#공감능력#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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