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로 찔리는 듯한 무릎 통증이 어느새 사라지고 의식마저 또렷해지면서 세상을 모든 가진 것처럼 가슴이 벅찼다. 심장 박동이 강해지면서 온몸에 엔도르핀이 도는 느낌이었다. 지난달 20일 오전 7시 38분(현지 시간), 레위니옹 생드니 르두트(Redoute) 경기장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166km 울트라 트레일러닝 레이스에 종지부를 찍었다. 레위니옹 남부 휴양도시 생피에르 해안에서 17일 오후 10시에 출발한 뒤 57시간38분18초 만에 완주한 것이다.
레위니옹은 아프리카 남동부 마다가스카르 동쪽에 위치한 프랑스령 섬으로 트레일러닝 대회인 ‘그랑 레드(Grand Raid)’가 지난달 17일부터 20일까지 열렸다. 이 대회 메인 종목인 ‘디아고날 데 푸(Diagonale des Fous)’는 166km 레이스로, 세계 10대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 가운데 하나다. 기자는 직접 이 종목에 참가해 걷고 달리며 온몸으로 레위니옹의 웅장함을 경험했다.
○ 고난도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
166km 레이스에 참가하기 위해 40여 개국 2715명이 몰려들었다. 디아고날 데 푸는 ‘미친 사람들의 대각선’이라는 뜻으로, 섬 남쪽에서 북쪽으로 대각선 방향으로 종주하는 코스다. 오르막을 모두 합친 누적 상승고도는 9600m로 수치상으로 본다면 한라산 관음사 탐방로 코스(누적 상승고도 1600m)에서 정상인 백록담을 6번을 왕복하는 수준이다. 트레일러닝은 포장도로를 달리는 일반 마라톤과 달리 산악, 들판, 하천, 계곡, 사막 등 자연 속을 달리는 스포츠다. 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며 최근 아시아 지역에서도 새로운 대회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레이스 출발 신호와 함께 꼬리를 문 선수들의 행렬이 생피에르 라빈 블랑슈 해안 도로에서 펼쳐졌다. 코스 옆에는 레위니옹 주민과 선수 지인들이 외치는 프랑스어 응원 구호인 ‘알리, 알리’ 소리와 함께 다양한 관악기, 아프리카 리듬의 타악기 소리로 가득했다. 산간 쪽으로 방향을 틀어 오르막이 이어지는 가운데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사탕수수 농장 마을 주민들이 나와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마을을 벗어난 뒤 선수들이 머리에 착용한 랜턴 불빛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해발 1m에서 2100m까지 39km에 이르는 길은 쉼 없는 오르막이다. 그사이 해가 떠오르면서 어둠에 가려졌던 거대한 화산 분화구 협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아래 시가지로 해가 비치고 양지가 넓어지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고난도 코스로 해발 2000m가량의 정상을 5번을 지나야 했다.
○ 제주와 비슷한 풍경의 화산섬 레이스
50km 지점을 지나는 길에 갑자기 낯익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눈 주변이 흰색인 귀여운 동박새였다. 제주의 텃새이기도 한 동박새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레위니옹은 화산섬인 제주와 많이 닮았다. 분화구는 제주의 오름(작은 화산체)과 비슷했고 삼나무 숲, 길가에 핀 개망초, 비파나무, 고비고사리 등도 너무나 익숙했다. 특히 레이스 내내 발을 괴롭혔던 돌길은 한라산국립공원 탐방로나 둘레길 바닥과 다를 바 없었다. 토심이 얕아서 나무뿌리가 그대로 드러난 것도 비슷했다.
하지만 120km 지점 실라오스 협곡에 있는 해발 2030m의 마이도 절벽을 마주했을 때는 낯선 경관에 압도당했다. 올라야 할 상승고도는 1000m가량으로 여의도 63빌딩(높이 250m) 4개를 수직으로 쌓아놓은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발은 천근만근이고 눈꺼풀도 계속 내려앉았다. 오전 11시경 태양은 너무나 뜨거웠다. 5분 걷고 2, 3분 쉬면서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은 덕에 결국 최대 고비를 넘어섰다. 레이스를 시작한 지 38시간이 지난 이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코스에 설치된 10여 개 간이휴게소에서 점검하는 제한시간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험악한 코스보다도 밀려드는 졸음과 싸우는 게 더 힘들었다. 깜빡 졸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위험이 있는 좁은 능선을 지날 때는 뺨을 수없이 때리고 꼬집었다. 환각과 환청 증상을 경험한 것도 이때였다. ○ 졸음과 체력 한계를 이겨낸 완주
최대 고비로 여겼던 마이도를 넘고서야 코스 옆에서 쪽잠을 청했다. 알람을 맞춰 둔 휴대전화에서 울리는 진동에 잠을 깼다. 깨어난 순간 멍한 상태였다가 3, 4분이 지나서야 레이스를 위해 레위니옹에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섬주섬 장비를 챙기고 코스에 들어서자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정신이 또렷해졌다. 40분의 쪽잠을 자고 나서인지 몸도 훨씬 가벼워졌다. 120km 지점을 지나면서부터는 코스 옆에 쪽잠을 자는 선수들이 부지기수였다.
140km 지점을 통과하자 완주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약도에 그려진 남은 구간은 그리 높지 않아 다소 편할 것으로 여겨졌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상황은 반대로 전개됐다. 몸은 더욱 지쳐 갔다. 이런 예단이 종반 레이스를 힘들게 한 화근이었다. 어둠이 깃든 종반 코스는 사람이 깔아놓은 돌을 밟아서 가는 길이었다. 2, 3km 정도려니 생각했는데 무려 8km가량 꾸불꾸불 이어진 오르막이었다. 1700년대 레위니옹에 처음 만든 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그 딱딱함으로 인해 발바닥과 무릎의 통증이 더해졌다.
세 번의 밤과 세 번의 아침을 맞이하고 나서야 기나긴 레이스를 끝냈다. 시원해지는가 싶더니 추워지고, 따뜻해지는가 싶더니 더워지는 날씨였지만 비를 맞지 않은 것만은 천만다행이었다. 화산 활동이 만든 경이로운 자연 경관, 그 속에서 삶을 만들어 가는 사람의 속살을 체험한 귀중한 시간이었다.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바닥까지 탈탈 털어내는 고난도 코스와 장엄한 경관은 세계에서 도전자를 끌어들이는 마력과도 같았다.
166km 레이스 참가자 가운데 완주자는 1953명(72%). 한국인으로는 기자 혼자 참가했다. 그레구아르 퀴르메(프랑스)가 23시간33분45초로 1위를 차지했다.
로베르 시코 그랑 레드 조직위원장은 “1989년 처음 대회가 열린 이후 코스 거리가 늘어나고 참가자도 매년 늘고 있다”며 “레위니옹의 자연을 즐기면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할 수 있는 도전적인 대회로 축제처럼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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