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된 2010년, 미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논의에 뛰어들었다. 중국 견제 포석이었다. 2005년 뉴질랜드 싱가포르 칠레 브루나이 등 4개국이 ‘경제 협력 마이너리그’로 시작한 TPP가 ‘중국 대항마’로 바뀐 것이다. 그러자 중국은 2012년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구축에 나섰다. TPP의 포위망을 뚫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집권 이후 탈퇴하면서 TPP는 유명무실해졌다. 반면 후발주자인 RCEP는 4일 한국 일본 등 15개국이 참가해 타결을 선언했다.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 주도 경쟁에서 중국이 ‘반판승’을 거둔 것이다.
▷미 국무부는 RCEP 타결 소식이 나온 직후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해 중국의 역내 항행 제한 등을 비판하며 견제에 나섰다. 하지만 미국이 같은 날 발표한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 선언으로 고립주의 이미지는 더 강해졌다. 세계 탄소 배출국 2위인 미국이 친환경 규제 강화로 일자리가 40만 개 줄어든다는 등의 주장을 펴며 기후협약에서 빠지겠다고 나선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6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파리협약은 불가역적인 것”이라는 문서에 서명한 것과 대비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작은 이익을 위해 큰 명분을 버리는 현장은 기후협약뿐이 아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고질적 편견을 갖고 있다”며 지난해 3월 유엔인권이사회를 탈퇴하고 분담금 불만으로 올해 1월 유네스코도 뛰쳐나왔다. 경제 2위국인 중국이 개도국 할인 우편요금을 적용받는다며 192개국이 가입한 145년 역사의 만국우편연합(UPU)도 탈퇴하겠다고 위협한다. 미국은 유엔 분담금도 수십억 달러 줄이고 심지어 세계무역기구(WTO) 탈퇴도 들먹이는 등 2차 대전 이후 자신들이 깔아놓은 질서를 부인하고 있다.
▷2017년 1월 다보스포럼에 참석해 자유무역 수호자를 자처한 시 주석은 RCEP 타결 이튿날도 상하이 국제수입박람회 연설에서 “경제 세계화는 역사적 흐름”이라고 했다. 중국은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의 32%, 인구 48%인 세계 최대 FTA인 RCEP의 주인공을 자처한다. 하지만 실제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빌미로 무역보복을 하고, 중국 진출 외국 기업에 굴복을 강요하는 자유무역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나라다. 그럼에도 미국이 고립주의로 가면서 중국이 ‘호랑이 없는 골짜기에 토끼가 선생’인 듯 행세하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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