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 한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 외국인 주민들이 관심 가질 만할 서울시 개최 행사, 축제 및 지원 사업을 청취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매달 재미있는 볼거리가 어쩌면 그렇게 많은지 신기하고 놀랍다. 사무실이 서울시청에 있다 보니 서울광장과 청계광장에 있는 다양한 행사들을 직접 볼 수 있다. 서울 다른 지역에서도 각양각색의 행사들이 매달 열리고 있다. 외국인 주민들에게 한국 문화를 알리는 사직대제나 서울 아리랑 페스티벌뿐만 아니라 한국인 주민과 문화교류도 할 수 있고 고향 냄새가 묻어있는 라틴아메리카 축제나 유러피안 크리스마스마켓까지 세계적인 행사에 참여할 수도 있다. 또한 하모니카 축제 및 프린지 페스티벌 같은 절충적인 행사까지 포함하면 주말에 심심할 새가 없다.
지난달 방송에서는 11월에 있을 큰 행사 두 가지를 청취자들에게 소개했다. 첫 번째는 청계천을 등으로 예쁘게 꾸민 빛초롱축제였고 두 번째는 서울 김장문화제였다. 김장문화제는 청취자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 경험담으로 방송 게시판이 바글바글했다. 근무하고 있는 김치박물관 시설 자랑에 여념이 없는 직원부터, 바로 지난 주말에 김장했던 분, 그리고 김치 관련 술 게임을 알려준 청취자까지 김치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하게 됐다. ‘이 채소로 만든 김치가 있을까’라는 문제의 답변에 따라 벌주를 거는 술 게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상상할 수 있는 ‘끔찍한 김치’는 뭐가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옥수수, 방울토마토, 양배추뿐 아니라 바나나, 파인애플, 두리안까지 거론됐다. 설마 있겠나 싶었던 김치도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블로그에 적힌 여러 레시피, 후기들이 있어서 정말 많이 웃었다. 물론 라디오 DJ는 외국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질문을 내게 던졌다. “김치를 잘 드세요?” 간단하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생방송이다 보니 답을 어떻게 할지 고민할 시간도 별로 없고, 대답하기도 애매했다. 외국인에게 자주 묻는 말 상위 3개에 포함된 이 질문은 김치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없이 대한민국의 끊임없는 자부심에 대해 ‘맛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답정너’(답이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식 질문이다. 그날 모험을 하기로 마음먹고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럭저럭’이라고 했다.
사실 나랑 김치는 좀 복잡한 사이다. 애증관계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한국에서 오래 살았으니 김치를 많이 먹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아침식사에 먹기에는 아직까지 거부감이 있다. 다른 식사 때에 김치를 안 먹어도 전혀 불편함은 없다. 뉴스에서 김치를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으로 효능을 언급하는 것도 종종 본다. 옛날의 나는 콧방귀를 뀌며 ‘웃기고 자빠졌다’고 비웃었지만 건강효과가 꽤 많다고 알려져 최근 생각이 바뀌고 있다. 특히 탈모 방지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듣곤 매일 김치만 먹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한편으론 영국을 방문할 때면 현지 마트에서 김치를 파는 것을 보고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김치 냄새를 맡으면 반가울 때도, 역겨울 때도 있으니 애증관계다.
김장문화제는 전국에서 온 다양한 지역 특산물을 판다고 해서 한번 가보기로 했다. 그중에 내가 꽤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일찍 갔다. 다양한 부스를 돌아다니며 각종 지역 김치를 맛보았지만 아쉽게도 ‘바로 이거다’라고 할 수 있는 김치를 찾지는 못했다. 그래도 내 입맛에 맞는 김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앞치마, 머리 망, 마스크 및 장갑을 착용하고 지시대로 김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김장은 생각보다 힘들어서 쌀쌀한 가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금방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작업하느라 계속 힘을 쓰다 보니 얼마 안 돼 이마에서도 땀이 났다. 눈으로 흘러 들어갈 것 같아서 무심코 양념을 묻은 손으로 눈을 비볐는데 순식간에 눈이 타는 듯 따가워 땀이 아니라 눈물이 줄줄 흘렀다. 비명을 참으며, 양 볼에 눈물을 흘리며 화장실로 뛰어가서 눈을 씻었다. 진정하고 나니 내가 그동안 살짝 무시했던 김치가 나한테 완벽한 복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