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한일고 교사-학생들 “공교육 모델이라더니… 문 닫으란 얘기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11일 03시 00분


‘자사고 폐지 유탄’ 맞은 공주 한일고… 정부, 자사고 2025년 폐지 발표하며
전국모집 일반고 49곳도 선발권 없애… 사교육 없이 ‘명문’ 성장한 한일고
인근 중학교 졸업생 10명도 안돼… 다른 지역 학생 아니면 정원 못채워
학교측 “정부가 의견조차 안물어”

충남 공주 한일고의 1학년 과학 수업은 학생들이 실험 주제를 직접 정하고 방법을 친구들에게 설명해 주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학생들은 친구의 설명에 따라 실험하고, 노트북에 내용을 메모하고 모르는 걸 찾기도 한다. 공주=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충남 공주 한일고의 1학년 과학 수업은 학생들이 실험 주제를 직접 정하고 방법을 친구들에게 설명해 주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학생들은 친구의 설명에 따라 실험하고, 노트북에 내용을 메모하고 모르는 걸 찾기도 한다. 공주=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6일 오전 충남 공주 한일고. 실험복을 입은 1학년 고태우 군이 칠판에 ‘손소독제 만들기’라고 썼다. 이어 다른 팀원 3명이 소독의 개념, 손소독제의 역사, 실험 방법 등을 설명했다. ‘일일 선생님’이 된 고 군 등은 친구들의 실험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살펴봤다. 박영철 교사는 멀찍이서 지켜봤다.

한일고 1학년은 학기 초에 조별로 하고 싶은 과학실험 과제를 제출하고, 교사는 연결지을 수 있는 교과 단원을 고민한다. 한 반에 9개 조가 있으니 1학년에 총 45건의 다른 실험이 진행된다. 각 조는 실험 전날 밤에 박 교사와 실험을 미리 해본 뒤 친구들에게 가르칠 내용을 정리한다. 박 교사는 “퇴근이 매일 늦지만 모두 다른 수업을 하니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일고의 이런 수업 풍경은 2025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교육부가 자율형사립고, 외국어고, 국제고를 2025년 일괄 폐지하는 방안을 7일 발표하면서 한일고처럼 전국에서 학생을 모집하는 일반고 49곳의 선발권도 폐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자사고 등이 사라진 뒤 전국 단위 일반고로 학생이 몰려 또 다른 고교 서열화가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게 교육부의 설명이다.

6일 기자가 한일고로 가는 길은 사방이 논밭이었다. 하나 있는 프랜차이즈 편의점이 낯설어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한일고의 대입 성적은 전국 일반고 기준으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뛰어나다. 지난해는 서울대 19명, 고려대 18명, 연세대 10명, 의학계열 53명이 합격하는 성과를 냈다. 사교육 하나 없이 이런 결과물을 낸 데는 밤 12시에는 자라고 해도 “왜 내 공부를 막느냐”는 학생, 퇴근하는 것도 마다하고 학생들 곁에 있어 주는 교사들의 열정이 원동력이 됐다.

1987년 개교한 한일고는 고 한조해 선생이 “나라 장래를 책임질 아이들을 기르고 싶다”며 세웠다. 교정에는 ‘세상을 품어라 한일 큰 그릇’이라는 문구가 있다. 학생들은 매일 오전 6시 반 기숙사에서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큰 그릇”을 세 번 외친다. 자사고나 특수목적고처럼 최상위권 중학생들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전원 기숙사에서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을 기르고 대입 성적도 좋다 보니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교육부는 한일고가 개교 때부터 전국 단위로 운영해온 방식 때문에 지역 내 학교들과 갈등을 빚자 2002년 농어촌 자율학교 1호로 지정하고 전국 단위 선발권을 인정해줬다. 현재 농어촌 자율학교는 한일고를 포함해 충북 충원고, 충남 목천고, 전북 한국마사고 익산고, 경남 거창고 거창대성고 남해해성고 함안고 등 9곳이 있다.

최근 교육부 발표로 2025년부터 지역에서만 학생을 뽑아야 하는 한일고는 “학교 문을 닫으라는 것”이라며 슬픔에 잠겼다. 한일고 인근 중학교는 한 해 졸업생이 10명 미만에 불과해 지역 학생들로는 학교를 유지할 수가 없다. 교육청 방침에 따라 매년 정원의 30%(42명)를 충남에서 선발하는데도 정원 미달이다. 개교 당시부터 학생들을 가르쳐온 최용희 교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국 단위 모집의 필요성을 모르고 ‘귀족 교육 한다’고 비판하더니 학교의 존폐가 달린 일인데 정부는 의견조차 묻지 않았다”고 말했다.

학생들도 걱정이 많았다. 2학년 장민준 군은 “여기서는 아무리 공부해도 지치지 않고, 게임을 생각하는 1초조차 아깝다. 친구들 덕분”이라고 했다. 2학년 송연재 군은 “(기숙사) ‘침대 선후배’가 축구 리그도 하고, 공부법이나 진로도 상담해 준다”고 전했다. 서울에서 온 3학년 박민서 군은 “정부가 모든 학교를 하향 평준화할 게 아니고 우리 같은 학교의 우수한 커리큘럼을 다른 일반고에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사는 “우리 학교를 보고 ‘정부가 바라는 진정한 공교육 모델’이라더니 이제 와서 남 탓을 한다”고 지적했다.

공주=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공주 한일고#자사고 폐지#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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