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를 많이 다녔지만 기념품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마그네틱(자석)만 열심히 모았는데, 나이가 들다 보니 하나 정도는 마련해야 하지 않나 하는 미련이 든다. 그리스에서 찾아보면 역시 제일 마음이 가는 것은 호플리테스(중장보병)이다. 중장보병의 장비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역시 투구, 그중에서도 제일 고색창연한 코린트식 투구다.
로마 중장보병의 투구와 비교하면 기능적으로나 화려함에서 로마군의 투구가 완전 한 수 위다. 로마군은 강철 투구였던 데 반해 그리스 투구는 청동이라 훨씬 무겁다. 코린트식 투구를 쓰면 측면 시야가 가리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앞만 보고 싸워야 하며 고개를 돌리기도 힘들다. 우리 민족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머리가 큰 우리 체형과는 안 맞아서 아마 제대로 쓰기도 힘들 것이다.
호플리테스의 보호장비로는 투구, 방패, 앞가슴가리개, 정강이가리개가 있다. 이 중에서 투구는 만들기도 어렵고 크기에 비해 가격도 비싸다. 방패로 상체 전면을 가리면 노출되는 부위가 머리였다. 적을 공격하고 방어하기 위해서도 머리를 방패 위로 노출시켜야 하기 때문에 머리는 공격을 받기도 쉽고 위험했다. 그래서 투구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코린트식 투구는 튼튼했지만 시야가 좁아 도무지 전투가 돌아가는 상황을 볼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 중장보병은 병사가 하나의 방패로 옆의 동료와 절반씩을 보호하면서 서로 바짝 붙어 싸우도록 했지만, 전투 상황에서 융통성이 크게 떨어졌다. 그리스군의 전투를 보면 약간 허망한 경우도 많고, 승리해도 전과를 별로 확대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기에는 기병이 약하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좁은 시야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나중에는 투구를 개량했지만, 그리스의 전통 호플리테스와 알렉산드로스의 군대, 로마군의 차이가 융통성과 적응력이다. 상황 변화를 무시하고 앞만 보고 싸우는 군대는 승리할 수 없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