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학번이 대학을 다닐 때 한국은 경제 고성장의 끝물이자 대중문화의 전성기였다. 이런 풍요로움은 집단보다 개인을, 국가나 사회보다 나 자신을 더 중시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선배 세대인 586들이 “시대에 대한 관심도 고민도 없는 속물”이라며 혀를 차도 여전히 저 잘난 맛에 대학생활을 했다. 언론이 이들을 X세대나 신인류로 규정했을 때 정작 많은 X세대는 눈을 흘기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일 뿐. 누구에게도 규정되고 싶지 않아.”
풍요로울 때는 풍요를 몰랐다는 사실은 배고픔이 와서야 깨닫게 됐다. 세기말에 덮친 외환위기는 어떤 집단에도 속하길 원치 않던 이들을 한순간에 ‘IMF 세대’로 엮어버렸다. 저주받은 94학번(남자는 91∼92학번)은 기업에서 대거 합격취소 통보를 받고 장기 백수 또는 ‘고시 낭인’의 길로 들어섰다. “아무리 학사경고를 받아도 기업에서 입도선매해 직장을 골라갔다”는 운동권 선배들의 술자리 자랑은 이들에겐 너무 비현실적인 얘기였다. 서류 광탈, 졸업 유예, 스펙 경쟁 등 요즘 대학가를 떠도는 많은 용어가 이즈음 태동했다.
그때만 해도 그저 아주 혹독한 ‘예방 주사’를 맞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는 서막에 불과했다. 2003년 카드대란과 2008년 금융위기로 X세대 직장인들은 상시 구조조정 위기에 놓이고 실질소득도 이전 세대보다 쪼그라들었다. 부동산에 대한 기억도 쓰라리다. 취업난과 저금리로 안정되게 종잣돈을 모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은 수십억 원대 강남 아파트는 고사하고, 각종 신도시 개발 혜택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남들 따라 뒤늦게 빚 얻어 집 샀다가 가랑이 찢어진 하우스푸어가 더 많다. 다니는 직장에선 586의 장기 집권에 눌려 아직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밤마다 주말마다 빡세게 일만 하다가 이제 좀 밑에 시켜볼 만한 지위가 되니까 주52시간제가 찾아왔다.
이 세대의 아픔은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시기에 접어들며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주 발표된 40대의 고용률은 78.5%로 21개월째 내리막을 걷고 있다. 제조업 침체로 좋은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이들 상당수가 노동시장에서 조기 퇴장하고 있다는 신호다. 가계 빚과 자녀교육비 부담에 짓눌리며 빈곤율도 20대를 추월했다. 40대는 직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연봉이 오르지만, 동시에 한 번 일터에서 밀려나면 다시 비슷한 조건의 일자리를 잡는 게 거의 불가능한 시기다. 이른 시기에 일자리를 잃은 이들의 앞에는 노후 빈곤으로 가는 특급 열차가 대기하고 있다.
경제의 ‘허리’ 역할을 하는 40대의 고용 부진에 대통령부터 장관까지 모두 안타깝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뚜렷한 해법은 내놓지 못한다. 이들의 일자리는 60대 노인처럼 재정을 풀어서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497의 블루스는 어떻게든 끊어내야 한다. 이 세대의 좌절과 무기력이 밀레니얼세대, Z세대까지 대물림되면 나라 경제가 자칫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 40대의 시련은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