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만화를 시작할 때 생각했어요. 만화 종주국 일본에서 내 작품을 연재하면 어떤 기분일까? 마치 K팝 가수가 빌보드에 진입한 기분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다음웹툰 ‘랑데부’가 지난해 11월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연재를 시작했다. 국내 웹툰 시장에서 인기가 검증된 극소수 완결 작품을 수출하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기획 단계부터 양국 동시 연재를 목표로 작품을 구상하고, 동시 연재로 이어진 사례는 처음이다. 이를 성사시킨 주인공은 ‘은밀하게 위대하게’ ‘나빌레라’로 유명한 HUN(본명 최종훈) 작가다.》
최근 경기 부천시의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똑같은 작품이라도 세밀한 표현을 다르게 다듬느라 일이 1.5배로 늘었다”는 행복한(?) 고민을 털어놨다. 이어 “늘 동경하던 일본 만화계가 작품 준비 과정에서 제게 웹툰 노하우를 묻는 경험이 무척 신선했다. 한국의 작가와 만화계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랑데부’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주인공 이연이 외계인의 침공으로 무너진 세상을 발견하고, 자신을 괴롭혔던 ‘일진’ 학생들에게 복수하는 내용이다. 장르를 구분하자면 공상과학(SF) 학원물. HUN 작가가 연출 및 스토리 작가로 참여했고, ‘나빌레라’에서 호흡을 맞춘 지민 작가가 작화를 맡았다. 국내에서는 다음웹툰과 카카오페이지에서, 일본에서는 만화 플랫폼 픽코마(piccoma)에서 연재 중이다. HUN 작가에 따르면, 양국 동시 연재를 진행하는 데 있어 그가 던진 ‘떡밥’이 가장 주효했다고 한다.
“일본 만화계에서 토론회를 열 때 종종 저를 협조토론자로 초청했어요. 발언 기회를 얻으면 ‘한일 양국이 새 작품을 같이 협업하고 동시 연재를 해도 좋겠다’는 의견을 은근히, 그리고 자주 흘렸죠. 일본 연재에 대한 ‘로망’은 있어도, 제 이름값으로 우길 수는 없잖아요. 하하하.”
일본 측이 반응한 건 시기적 변화, 운도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만화 강국인 일본도 웹에서 페이지를 넘겨 보는 방식에서 스크롤을 이용해 내려 보는 형태로 시장이 재편되고 있었다. 그는 “20년 가까이 스크롤 연출 노하우가 축적된 한국과 달리 일본은 만화 스크롤화에 대한 노하우가 적은 편”이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동시 연재는 닻을 올렸다. 그런데 “신경 쓸 게 너무 많다. 일이 생각보다 커져버렸다”는 토로가 이어졌다. 특히 단어의 뉘앙스, 편집 방향이 난관이었다. 그는 “대사가 과하게 의역이 되는 것도 막아야 한다. 만화를 읽는 방향도 한국(왼쪽 위부터)과 일본(오른쪽 위부터)이 다르기 때문에 연출의 흐름, 말풍선 위치, 효과음 적는 곳, 컷의 간격 배치도 일일이 따져야 한다”고 했다.
필요에 따라 그림을 다르게 그리는 일도 있다. 간판 이름이나 차선 위치도 달라진다.
“떡볶이를 먹는 장면이 있어요. 일본판에서 다코야키, 오코노미야키로 바꿔야 하나 고민한 적도 있죠. 하지만 모든 걸 현지에 맞추거나, 일본 만화인 척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앞선 히트작에서 “소재는 달라도 결국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그는 “이번만큼은 가장 ‘만화적 만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권선징악’ 주제의 학원물이 주는 재미는 물론이고 좋은 액션, 컷을 잘 쌓아서 ‘꽤 괜찮은 만화’라는 타이틀을 얻고 싶다는 것. 작가생활 20년 만에 그는 일본 무대에서 다시 신인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저라는 작가는 일본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잖아요. 속된 말로 양국에서 ‘깔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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