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3일 보수 진영 단결을 위한 명분을 내걸고 출범한 국민통합연대의 공동대표 5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린 이문열 작가가 던진 화두다. 이 작가가 과거 야당의 공천심사위원을 맡거나 지난해 하반기 보수 단체 집회에 몇 차례 참가하기는 했지만 정치 단체에 공식 직함을 맡은 것은 처음이고 발언 수위도 이례적이다. 그의 사재로 세운 경기 이천의 ‘부악문원(負岳文院)’을 지난주 찾았다. 부악문원은 아이를 업은 모습을 닮았다는 부아악산(負兒岳山) 자락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20년 넘게 문학 강좌나 문인들의 창작 집필실로도 활용되는 곳이다. 》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데 문필을 대표하는 분이 ‘붓을 던지고 창을 들라’고 했다.
“국운이 기울 때 조선 고종이 안동 지역 지사들에게 내탕금을 보내면서 선비들에게 했던 말을 인용했다. 글의 힘만으로는 안 통하는 사회가 됐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 말이다. 한가하게 글만 쓰고 구경꾼으로 훈수로 그치지 않아야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다소 격앙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든다.”
―‘절박한 심정’은 무슨 뜻인지.
“예전에도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었으나 그렇다고 글을 못 쓴 적은 없다. 그런데 지난 1년간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글을 쓰다가도 써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다. 그런 심정에서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국민통합연대에는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김진홍 목사, 최병국 전 의원, 권영빈 전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이 작가 등 5명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 노재봉 전 국무총리가 원로자문단으로 참가하는 등 보수 인사 500여 명이 참여했다.
―통합연대 출범식에서 이재오 전 의원이나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 등은 한국당이나 황교안 대표에게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 ‘통합연대가 오히려 보수 분열 작용을 할 수도 있는데 이 작가가 멋모르고 참가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장외에 있다가 직접 뛰어들어 대표가 되고 무슨 선언의 주인공이 되는 주동적인 역할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신중을 다했다. 보수 진영 통합이 절실한 만큼 그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다섯 번, 여섯 번 확인하고 결정했다.”
―통합연대가 출범한 뒤 한국당과의 접촉 등 별다른 진전된 움직임은 없는 것 같다.
“황교안 대표가 단식 후유증과 피로로 다시 입원했을 때 공동대표단이 문병을 가려고 접촉했는데 방문하려는 날 퇴원해서 이뤄지지 못했다. 통합연대가 뜻을 이루려면 한국당과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된다. 통합연대를 공천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무슨 자리를 만들 구실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한국당과 무슨 ‘통합공천연대’ 같은 것을 만들자고 하면 ‘콧등 까이기(심하게 비판받는다는 의미) 좋을 것’이다. 통합연대 참여 인사들은 ‘선거 안 나간다. 무슨 당도 만들지 않는다’고 분명히 선언해서 의심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6월 황 대표가 부악문원에 찾아왔을 때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정책을 호되게 비판하는 등 대화가 냉랭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블랙리스트는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지만 황 대표에 대해서는 어떤 불신이나 비호감을 드러낸 적 없다. 지금도 실제로도 그렇지 않다. 1시간 넘게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그 부분만 부각됐다.” ―‘창을 들 때’ 발언은 2016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촛불 민심이 높아지고 있을 무렵 한 언론에 ‘보수가 죽어야 한다’고 한 기고 이후 가장 격렬한 표현이다.
“당시 ‘진박(眞朴)’계는 자신들을 겨냥한다고 여겼다. 보수 진영으로부터 그때만큼 무시를 당한 적이 없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사태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안 지고 있다. 죽는다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다. 지금도 누구 한 명 백의종군하면서 다음 선거에 나오지 않겠다는 사람이 없다. 잘못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면 이 나라는 사람이 없는 나라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주로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세상에 쓴소리를 해 온 이 작가는 지난해 10월 3일 100만 명이 모인 광화문 집회에 얼굴을 비쳤다. 세 번째 광화문 주말 집회 때는 ‘문재인 하야 범국민투쟁본부’ 주도의 모임에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그는 “조국 전 장관을 구한다며 공지영 이외수 황석영 등의 말이 잇따라 나온 뒤 ‘우파 작가들은 어디 갔냐’고 할까 봐 올라가서 한마디했다”고 했다. 이 작가는 5년 선배인 황석영 씨와 개인적으로는 친한 사이다.
―2004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맡아 ‘이문열이 정치를 하나?’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는데….
“이번 통합연대 참가 권유도 그렇지만, 집안의 가까운 친척이자 고향 선배인 재오 형(이재오 전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후유증으로 ‘100석도 못 건지게 생겼다’며 와달라고 해서 갔다. 선거가 끝난 후 다시 저술 활동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후에 내 이력에 그 많은 소설은 한 편도 거론하지 않아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은 꼭 들어갔다. 나를 강렬하게 낙인찍는 데 사용될 줄 몰랐다.”
―지난해 신동아에 연재하던 ‘둔주곡(遁走曲) 80년대’를 쓸 때는 신장암 투병으로 절박한 마음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 상태인가.
“2년여 전 신장 한쪽의 반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다른 부위로 전이는 없었다. 4년 6개월 만에 신장암은 끝났다고 최근 병원에서 얘기해줬다.”
―이문열은 필명이고, 부친이 이름에 열(烈)자를 붙여준 계기가 있다고 하는데….
“모친이 임신했을 때 좌익 활동을 하는 부친을 도와 전단지를 돌리다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갔다. 부친이 ‘배 속에서부터 치열하게 싸우는 투사’라며 이열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좌익 투사 이름을 타고난 내가 ‘보수 우파 꼴통’ 소리를 듣는 상황이다.”
―필명 ‘문열(文烈)’은 어떤 계기로 쓴 것인가.
“사법시험 준비한다고 절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만난 역술인이 ‘사법시험은 안 되니 그만두라’고 잘라 말하더라. 그러더니 ‘열(烈)’자는 황제나 왕의 시호에나 쓰는 거라 기세를 눌러주는 글자를 보태라고 했다. 이등렬(李等烈) 이여열(李與烈) 등을 얘기했다. 내가 앞으로 글을 쓸 생각이니 문(文)자를 넣겠다고 했다. 지금도 신분증 이름은 ‘이열’이다.”
―부친의 월북 그리고 남쪽에 남은 모친과 5남매 등 가족이 ‘빨갱이 집안’이라며 쫓겨서 옮겨 다니며 산 이야기는 ‘영웅시대’ 등 여러 작품에 투영됐다.
“부친(이원철)은 6·25 때 월북 후 박헌영과 연관돼서 사실상 숙청됐다. 원산의 대학에서 자리를 얻었다는 것은 헛소문이다. 아오지 탄광이 있는 회령의 협동농장에서 평농장원으로 30년 넘게 살았는데 탈북자들 말을 들으면 아오지 탄광 광원과 농장원이 별 차이가 없다고 했다.”
이 작가는 대구 매일신문 기자이던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하곡’이 당선돼 등단했다. 발표한 작품은 장편 30편, 중단편은 60편이 넘는다.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변경’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영웅시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 많은 베스트셀러를 쏟아냈다. ‘평역 삼국지’는 2000만 권 넘게 팔렸다.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그이지만 독자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에 대한 초조감도 솔직히 털어놨다. ‘천하의 이문열도 이런 걱정을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리카 어디에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기간을 ‘생존 기간’으로 친다. 그가 잊혀진 날이 죽은 날이다. 내가 살아 있는 채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작가가 인터뷰 말미에 ‘달아난 악령’ ‘사로잡힌 악령’ 등 요즘 미투 운동과도 관련 있는 자신의 ‘악령 시리즈’ 작품에 대해 얘기할 때는 생기가 넘쳤다. 정치 활동이나 분열된 사회에 대해 얘기할 때의 침울함과는 대조적이었다. ‘문원(文院)’이라는 문패에 걸맞게 문학과 삶, 세계 등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때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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