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꿈나무’로 변신한 허재 전 농구대표팀 감독(55)이 늘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다. 코트를 호령하던 그도 은퇴를 고민하던 30대 후반에는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다. 출전을 기약할 수 없는 식스맨 신세였지만 오히려 난생처음 겪은 그런 경험이 자신을 키웠다고 말한다. “평소 후보 선수인 후배들에게 자주 한 얘기가 있어요. ‘쉬다 나왔는데 고작 그 정도밖에 못 하느냐’는 지적이었죠. 정작 내가 그 처지가 되니 얼굴이 저절로 화끈거리더군요.” 교체멤버로 나서다 보니 땀이 식어 슛도 잘 안 나가고, 밸런스 잡기도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 후로는 후배들에게 함부로 말을 하지 않게 됐다.
허 전 감독은 유니폼을 벗은 뒤 프로농구 KCC 사령탑으로 우승 2회, 준우승 1회의 성적을 거뒀다. 1997년 출범한 프로농구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우승한 건 그가 최초. “선수 말년을 떠올리며 말은 아끼고 선수들의 애환을 챙겼던 것도 팀 전력에 큰 도움이 됐어요.” 그러고 보니 허 전 감독의 방송 캐릭터는 농구 기자로 20년 가까이 지켜본 선수 때의 화려함과는 사뭇 다르다. ‘농구 대통령’ ‘농구 9단’이란 별명처럼 상대 수비를 휘젓고 다니는 눈부신 개인기, 폭발적인 슈팅 등 카리스마가 넘쳤다. 매서운 눈빛은 레이저 같았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흘러도, 손가락이 부러져도 코트를 지키는 투혼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방송인 허재는 어딘가 허술하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소문난 주당이다. 상대 수비 선수는 그의 입에서 뿜어대는 술 냄새 때문에 제대로 막지를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았다. 요즘은 방송 전날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는 그가 나오는 예능을 보면 어수룩한 ‘허당’처럼 보인다. 어이없는 헛발질이나 동네 아저씨 같은 푸근한 미소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독불장군, 원맨쇼와는 거리가 멀다. 두 아들을 모두 농구 스타로 키운 허 전 감독은 “아이들한테 동료들을 배려하고 입보다 귀를 먼저 열어두라 한다”고 말했다. 카메라 앞에서 권위를 내려놓는 모습으로 솔선수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배구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신치용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장(65)은 새해 들어 허 전 감독만큼이나 부쩍 바빠졌다. 7월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주위의 관심이 높아져서다. 4년 동안 굵은 땀방울을 쏟아온 태극전사를 이끌고 있는 신 촌장은 삼성화재 감독 시절 우승 제조기로 유명했다. 무려 20년이나 팀을 맡아 77연승, V리그 8회 등 총 16회나 정상에 올랐다. 선수와의 소통과 철저한 관리 배구가 주효했다.
이번 시즌 프로배구 남자부 7개 팀 감독 가운데 6명이 신 촌장의 제자다. 신 촌장이 지도자가 된 제자들을 만나면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게 있다. “말조심하라고 합니다. 선수들을 향해 ‘왜 이런 것도 못하느냐’ ‘내가 하면 더 잘할 거다’라는 식으로 떠들면 반감만 사죠. 앞에선 ‘네네’ 하다 돌아서면 ‘너나 잘하세요’라고 콧방귀를 뀝니다.” 오랜 지도자 인생에서 터득한 진심 어린 조언이다. 그는 “젊은 세대는 빵과 돈이 전부가 아니다. 존중과 경청이 지도의 기본이다. 선수 마음을 움직여야 이긴다”고 했다. 겨울스포츠의 꽃인 농구와 배구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허 전 감독과 신 촌장. 종목은 달라도 코트 안팎에서 오랜 세월 정상을 달린 비결이 어딘가 닮았다.
신년 각오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이런저런 다짐을 하게 되는 시기다. 예년보다 빠른 설도 다가온다. 온 가족이 모이면 명절 상차림만큼이나 푸짐한 말잔치가 펼쳐진다. 그 옛날 마크 트웨인이 그랬다. ‘사람이 말을 더 많이 해야 했다면 입 두 개에 귀 하나였을 것이다.’ 올 한 해 적어도 세 치 혀가 비수가 되는 일만큼은 줄어들었으면. 세대를 불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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