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내가 만난 名문장]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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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김선영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의사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기회이자 책임, 그리고 의무다.

―‘해리슨의 내과학 원리’ 중

‘해리슨의 내과학 원리’는 전 세계 의대생, 의사들이 보는 내과(內科)학 교과서다. 심장, 호흡기, 소화기 등 각 학문의 ‘엑기스’만 모았는데도 양이 방대해 아마도 이것을 다 읽고 의사가 된 사람은 드물 것 같다. 예전엔 의대 교수님들은 다 읽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가 의대 교수가 되고 보니 아닐 것 같다는 심증이 굳어졌다. 나는 의료인의 희생과 봉사를 기대하는 관점에 반감이 많다. 한국 의료계의 부조리는 의료인의 직업윤리만이 문제가 아님에도 툭하면 히포크라테스 선서 운운하는 언론도 질색이다. 의사는 신도 성직자도 아니요 생활인이다. 때로는 ‘찌질한’ 감정을 느끼고 인내와 체력에는 한계가 있고 개인이 어찌 할 수 없는 제도의 문제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이 모든 현실 앞에 지치고 닳은 냉소와 체념 한가운데에서도 저 문장을 다시 읽을 때면 느껴지는 벅참과 숙연함은 어떤 의미일까. 내게 기댄 많은 환자들의 눈빛. 내 한마디에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희망으로 부풀기도 하는 마음들이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전이암 진단을 받고 절망에 빠져 있는 환자에게 “신약 임상시험을 해보자”고 말하는 것, 완치를 바라는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그를 위해 새로운 길을 탐색하는 것은 기회다. 치료의 여정에서 환자의 몸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것은 책임이다. 환자의 슬픔과 분노, 죽음에 대한 공포를 받아들이는 것은 의사의 의무다. 이 문장을 처음 접한 것은 의사가 된 이후였다. 지금은 안다. 의업이라는 것은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친 일상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엄중한 기회와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이라는 것을.

김선영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해리슨의 내과학 원리#히포크라테스 선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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