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6월 일본 연합함대 함정들이 태평양을 가르고 있었다. 목표는 미국의 최전방 기지인 미드웨이였다. 태평양 전쟁의 결정적 전투를 꼽으라고 하면 진주만 습격보다 먼저 미드웨이 해전이다. 일본군은 항모 8척, 전함 11척, 순양함 23척을 동원했다. 전함 중에는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도도 있었다. 미군은 항모가 2척뿐이었고 전함은 없었다. 순양함, 구축함은 3분의 1 규모밖에 되지 않았다. 미군의 뇌격기는 ‘날아다니는 관’이란 소리를 들었고, 어뢰는 불발되기 일쑤였다. 실제로 미군 뇌격기의 전과(戰果)는 거의 전무했고 무차별 학살당했다. 일본군의 제로센은 나중에 약점이 밝혀졌지만 당시엔 공포의 전투기였다. 오늘날 미국 입장에서 보면 믿기지 않는 열세였고, 그 뒤로 현재까지 이런 비장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질 수 없는 전투에서 일본군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행동을 거듭한다. 희한하게도 이 세기의 항모대전에서 양측 지휘관 스프루언스와 나구모는 둘 다 초보자였다. 그러나 우왕좌왕한 나구모와 달리 스프루언스는 탁월한 판단력을 발휘했다. 양측의 인재관리 시스템에 치명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다 합친 것보다 큰 실수가 있었다. 일본군이 함대를 셋으로 분할한 것이다. 그중 한 함대는 쓸데없이 미군 함대를 유인한다고 알류샨 열도 쪽으로 갔다. 미군은 유인당할 함대도 없었다.
최후의 순간 미군은 수리 중이던 요크타운호를 바다로 끌어냈다. 항모 8 대 2의 싸움이 될 뻔한 전투가 4 대 3의 전투가 되었다. 일본군은 왜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했을까? 짐작이지만 일본도 미군의 산업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미국이 전시산업 체제로 완전히 전환하기 전에 최대한 타격을 입히고 자신들의 손실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꾸 사실을 왜곡하고, 맞지 않는 전술에 집착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현실을 똑바로 인지하고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이게 그렇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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