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떼는 순간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것만 같은 100세 꼰대 할아버지. 정작 그의 입에서는 “가자”는 말이 제일 많이 튀어나온다. 그냥 동네 마실 가자는 수준이 아니다. 명확한 목적지도 없다. 젊은이들이 ‘이래도 되나’ 싶을 때면 그가 먼저 “일단 고!”를 외친다.
고향 스웨덴을 떠나 세계를 누비며 폭탄이 터지든, 사람이 죽든 “살아보니 뭐 그럴 수 있다”며 위로를 건네는 이 노인. ‘연기 장인(匠人)’ 배해선(46)이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초월적 여유와 위트로 무장한 100세 알란 역을 맡았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9일 만난 배해선은 “‘어디 네가 해봐라’ 대신 ‘가자’를 외치는 주인공의 말에 이상하게 꽂혀버렸다”며 “무심한 듯 진심이 담긴 대사에 저도 위로받는다”고 했다.
1995년 연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데뷔한 그는 연극 ‘오이디푸스’ ‘그을린 사랑’을 비롯해 뮤지컬 ‘맘마미아’ ‘에비타’ ‘브로드웨이 42번가’ 등에 출연한 믿고 보는 배우다. 최근에는 TV와 스크린에서도 존재감을 뽐냈다. 첫 영화 ‘암수살인’을 시작으로 ‘엑시트’ ‘로망’ 등에 출연했고 지난해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는 객실장 최서희 역을 맡았다. 그는 “무대와 마찬가지로 촬영지에서도 ‘그냥 그 캐릭터 자체가 되자’는 마음을 가졌다. 대중에게 저를 알리는 과정은 흥미로웠다”면서도 “역시 무대가 진짜 내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차기작은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동명 소설을 무대로 옮긴 연극 ‘창문 넘어…’다. 100세 생일을 앞두고 양로원 창문을 넘으며 시작된 알란의 여정과 그가 태어난 1905년 이후 행적을 교차해 보여준다. 스페인 내전, 미국 핵개발 등 근현대사의 장면에 등장하고 처칠, 드골, 마오쩌둥, 김일성과도 만난다.
소설 속 막대한 시공간과 인물을 무대에 담기 위해 배우 5명이 캐릭터 60여 개를 연기하는 ‘캐릭터 저글링’(여러 캐릭터를 동시에 소화하는 연기)을 한다. 한 명당 배역이 평균 12개. 이 설정이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100세 할아버지를 연기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작품이 실험적이었어요. 저보다 경험이 풍부한 선배가 알란을 연기해야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았죠. ‘진짜 연기’로 안 보일까 봐 두려웠거든요.”
장고 끝에 “늘 새로운 것에 끌린다”는 도전정신이 걱정을 눌렀다. 배우 오용과 더블캐스팅으로 무대에 서며 100세 할아버지와 나이, 성별 등 모든 게 다르지만 인물의 진짜 이야기에 집중하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작품에 임하자 새 고민거리도 생겼다. 체력이다. 무대에서 쉼 없이 이름표, 의상을 교체하고 춤도 추는 탓에 체력 소모가 꽤 크다. 그는 “서커스를 방불케 할 만큼 배우 간 합(合)이 중요하다. 이전에 겪지 못한 한계에 도전 중”이라고 했다.
다음 달 2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4만∼5만5000원.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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