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인과 딸 나민애 교수
세상 모든 딸에게 보내는 시집 ‘너의 햇볕에…’ 낸 나태주 시인
“내 시는 독자가 눈물로 완성”
어스름 새벽, 인기척에 눈을 비비고 쳐다보면 아버지의 굽은 어깨와 하얀 러닝셔츠 바람 등이 보였다. 단칸방 30촉 백열전구 아래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끊임없이 쓰던 아버지. 공주 시내 서점 두 곳에서 사온 각종 문예잡지와 신간이 바닥서부터 벽을 만들었다. 1980년대, 나태주 시인(75)과 문학평론가인 딸 나민애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41)의 공간이었다.
껌딱지같이 초등학교 교사이자 시인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딸과 그 아버지가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시집을 놓고 만났다. 나 시인이 세상 모든 딸들에게 안부를 묻는 시 106편을 묶은 ‘너의 햇볕에 마음을 말린다’(홍성사)이다.
“(딸이 어렸을 때는) 제게 딸은 나민애로 한정됐는데 오래 쓰다 보니 ‘많은 딸’로 변해요. 하나의 특정한 풀꽃, 제비꽃에서 모든 제비꽃으로, 특수한 무엇도 갖고 있지만 무한한 보편도 갖게 되는 것. 제가 졸렬하고 모자란 시인이지만 이건 제 강점이지요.”
시집에는 나 교수뿐만 아니라 혼자 한글을 배워 한국시를 읽어온 25세 알제리 여성 샤히라 등 여러 딸(여성)이 나온다. 샤히라는 몇 년 전 나 시인이 알제리에서 강연할 때 한글로 쓴 시 ‘풀꽃’을 적고, 말린 풀꽃을 붙인 공책을 들고 강연장까지 찾아왔다.
나 교수는 아버지 시의 보편성을 ‘공감의 확산성’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저를 예뻐하니까 세상의 모든 여덟 살, 열 살, 스무 살의 ‘나민애 닮은 애’가 다 예쁜 거예요. 공감이 확산된다는 거죠.”
보편을 추구하는 노시인은 겸손하다. “제 시는 굉장히 허술해요. 그래서 독자가 완성합니다. 무엇으로요? (공감의) 울음으로요. 시 ‘풀꽃’에도 독자들이 ‘아, 나도 그렇다’라고 한 줄을 더 넣어요. 그것이 보편입니다.” 그러나 평론가인 딸이 볼 때 그 허술함은 “시인의 자아비판이 아니라 본인 시의 장점”이다.
어린 시절 나 시인은 집 밖에서 꾸깃꾸깃한 종이쪼가리에 시를 써와서는 어린 딸에게 읽어줬다. “들어봐, 이 단어가 낫겠니?” 그러면서 시를 고쳤다. 나 교수는 ‘아, 저렇게 시를 쓰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아버지처럼 글을 쓰는 선생님이 되겠지 생각하던 나 교수에게 ‘당연히 국문과에 가야 한다’고 한 사람은 아버지다. 다만 시인이 되는 것은 말렸다.
“문학세계는 냉정하고 치사해요. 얘가 나보다 시를 더 잘 쓰면 내가 불행할 수 있어요. 얘가 못 쓰면 얘가 불행한 거고요. 나는 얘가 불행해지는 건 원하지 않아요.” 어머니는 월급날이면 책과 술 외상값 갚고 남은 돈으로 쌀과 연탄을 비축하는 가난이 싫었을 테다.
나 교수는 “시인은 뭔가 상처가 많고 아파서 수액(樹液)처럼 나오는 것이어서 이해는 하고 싶지만 경험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버지는 참나무처럼 수액이 많이 나오는 분이에요. 저는 수액을 맛보고 ‘참 달다’고 얘기하는 풍뎅이 정도?”라고 했다.
나 시인은 딸이 1주일에 한 번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시가 깃든 삶’ 코너로 딸의 상태를 확인한다. “딸의 글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생략된 마음이 있어요. 마음을 떨어뜨리고 가는 거죠. 그 글을 읽고 얘 상태를 딱 알아요.” 그러고는 ‘밥 잘 먹고. 힘내’ 문자메시지를 툭 보낸다.
나 교수는 시 ‘너 가다가’를 가장 와 닿은 시로 꼽았다. 아버지의 오랜 투병 등으로 마음에 병이 든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실린 시였다. ‘너 가다가/힘들거든 뒤를 보거라/조그만 내가/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딸이 빛나기 위해 한없이 작아질 수 있다는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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