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중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싸우던 독일군 대대는 대치 중인 상대편 영국군 대대와 ‘5시 이후에는 싸우지 말자’는 협정을 맺었다. 이것은 두 대대 간에만 통하는 비밀협정이었다. 혹 병사가 실종되면 서로 무전으로 당신네 포로 중에 이런저런 사람 없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어느 날 독일군이 영국군 소위를 포로로 잡았다. 영국군 장교는 자신이 귀족이며 담배 회사를 소유한 가문의 아들이라고 자랑했다. 당시 독일군은 지중해의 제해권, 제공권을 연합군에 장악당하는 바람에 보급품 수송선이 족족 격침당해서 극심한 보급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담배도 부족했다. 한 독일군 장교가 보급이 풍족한 영국군에 이 포로와 담배를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영국군 소위는 자신의 몸값으로 담배 100만 개비는 문제없다고 호언장담했다. 무전으로 영국군에 100만 개비를 제의하자, 영국군 측에서 자신들도 담배가 부족해서 100만은 곤란하고 50만 개비면 가능하다는 제안이 왔다. 굶주린 독일군으로서는 50만 개비도 얼씨구나 할 판이었는데, 그 영국군 소위가 자신의 몸값을 50만 개비로 책정했다는 말에 분노했다. 그는 거래를 거부하고 포로수용소행을 택했다고 한다.
로멜은 전쟁 중에도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며 기록 사진을 찍고 상세한 회고록을 남겼는데, 북아프리카 전쟁은 2차 대전의 여러 격전장 중에서도 가장 신사적이고 기사도가 살아 있던 전선이었다고 말했다. 사막에서 싸우니 민간인을 학살할 일도 적었고, 눈으로 봐서는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은 황량한 사막, 물과 식량이 결핍된 상태에서 싸우니 양측의 병사들 모두 허무하기도 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의 전선에는 정치적, 이념적 이해가 걸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해관계가 걸리면 합리를 상실한다. 집단적 이해관계가 걸리면 학살도 고귀한 결단으로 포장된다. 이런 약점을 이용해 현상을 이분화하고, 해법을 단순화하는 것이 진영논리이고 정치적 선동이다. 우리 사회는 사회지도자, 정치인이란 집단들이 이미 선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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