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에 양조장에서는 무엇을 하죠? 요즘엔 농사를 짓지 않으니 시간이 좀 넉넉한 때 아닌가요? 이럴 때 여행도 좀 다니고 해야겠네요.” 사람들은 우리가 겨울엔 좀 한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겨울이 오면 팔도를 다녀보리라 계획을 짜지만 막상 겨울이 되면 꼼짝할 수가 없다. 양조장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존재이며 늘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올겨울은 유난히 따뜻하지만 충주의 시골 마을엔 매일 아침 찬 서리가 내리고 싸늘하다. 양조장은 덥거나 습기 찬 날을 싫어한다. 너무 더운 것은 절대 안 되지만 너무 추워도 안 된다. 적당하게 건조한 서늘함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괜찮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까다로운 남자 같다. 매일 아침 불을 지펴 습도를 없애고 찬 기운도 조금 가시게 해주어야 한다.
“올해 장작은 너무 얇군. 작년보다 많이 못하네.” 레돔은 불을 피울 때마다 똑같은 소리를 한다. 목재소에서 통나무를 자르고 남은 자투리들을 구입했는데 올해는 얇은 것들이 너무 많다. 작년에는 굵은 옹이가 섞여 있어서 괜찮았는데. 종잇장 같은 장작을 불쏘시개로 넣고 중간 것들과 굵은 것들을 섞어 불을 피운다. 불이 곱게 잘 타는 것을 확인한 뒤 레돔은 발효실에 들어가서 지난해 12월에 착즙해서 발효 중인 와인을 체크한다.
“탱크갈이를 해야겠군. 효모가 너무 많이 불어났어.” 추운 날에도 효모는 쉬지 않고 발효해서 탱크 아래에 찌꺼기가 가득 내려앉았다. 그는 위에서 출렁거리는 맑은 과일즙을 새 발효 통으로 옮긴 뒤 아래에 내려앉은 찌꺼기는 작은 통으로 옮겨 담는다. 맑은 술로 완성되어 유리병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수없이 탱크갈이를 하지만 한 방울도 버리지 않는다. 술 찌꺼기에는 생명력 넘치는 효모가 가득하다. 그래서 탱크갈이를 하는 날에는 꼭 빵을 구워야 한다. 효모가 가장 힘이 센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 밀 통밀에 갓 나온 술 찌꺼기를 넣으면 대충 반죽을 해도 참 잘 부풀어 오른다. 이런 참, 힘이 세기도 하지! 발효 통에서 갓 나온 효모로 빵 반죽을 하면 실패할 확률이 제로다. 그냥 저 혼자 다 발효시켜 한껏 부풀어 올라온다. 반죽의 공기를 빼서 잘 다독인 뒤 젖은 행주를 덮어 장작 난로 위에서 덥힌 따뜻한 벽돌 위에 올려둔다. 반죽이 숙성될 동안 점심을 만든다. 제주 농부에게 직접 구입한 컬리플라워다. 신부의 부케처럼 생긴 하얀 꽃배추다. 얇게 잘라 우유를 끼얹어 오븐에 굽는 그라탕을 만든다. 오븐을 켠 김에 후다닥 사과파이 구울 준비도 한다. 틀에다 반죽을 깔고 그 위에 껍질을 벗겨 자른 사과를 듬뿍 올린 뒤 아몬드, 계피를 조금씩 뿌려준다. 이제 사과파이는 오븐 앞에 줄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이제 점심시간이다!”
내가 소리치면 그는 술 찌꺼기 중에서 그래도 맑은 부분을 병에 담아 온다. 나는 언제나 맑은 술을 마시고 싶어 하지만 그는 곧잘 탁한 술을 가져온다. 좋은 술은 팔아야 하고 찌꺼기 술은 주인이 마시는 법이란다. 밥을 먹고 나면 오븐에서 바쁘게 사과파이가 나와 뜨거운 파이를 먹게 된다. 파이가 나오면 이제 빵 차례다. 오븐이 식기 전에 빵 반죽이 들어간다. 빵이 익는 동안 레돔은 사과와인 증류하는 일을 시작한다. 농사 때문에 미루었던 모든 일을 1월에 다 끝내야 마음 편하게 봄맞이를 할 수 있다.
동으로 된 작은 증류기에 사과와인을 가득 붓고 가스 불을 켠다. 증류는 꼭 겨울에 해야 한다. 여름 증류는 질식할 것 같지만 겨울엔 사과와인이 끓는 열기로 집 안이 따뜻해져서 난로를 지필 필요가 없다. 사과주가 끓어서 수증기가 되어 차가운 물을 통과해 똑똑 소리를 내면서 독한 술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본다. 바깥은 겨울이지만 양조장 안은 빵 익는 냄새와 사과주 끓는 냄새와 열기로 가득하다. 양조장의 1월의 하루는 아직도 진행 중이고 내일도 진행 중일 것이다.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