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중앙지법 558호 법정. 원고석에는 한모 씨(85)가 ‘6·25 국가유공자’라고 적힌 모자를 눌러쓰고 손을 가늘게 떨며 앉아 있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 포로로 잡힌 한 씨는 1953년 정전이 됐지만 돌아올 수 없었다. 평안남도 탄광에서 북한 내무성 건설대 소속으로 33개월간 강제노역을 했다. 50년간 국군포로라고 감시를 당하며 광부로 비참하게 살던 한 씨는 2001년 탈북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016년 10월 다른 국군포로 노모 씨(90)와 함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체불임금과 위자료를 포함해 1인당 2100만 원씩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날 법정 피고석은 텅 비어 있었다.
▷이는 김정은을 상대로 한 국내 첫 손해배상 청구소송이다. 한 씨는 “돈 몇 푼 받자고 소송을 한 게 아니다. 국군포로 몇만 명이 북한에 존재한다”며 남도, 북도 외면한 국군포로 송환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김현 전 대한변호사협회장을 비롯한 변호인단은 승소한다면 국내에 있는 북한 재산을 배상금으로 달라고 요청할 계획이다. 한국 법원에는 북한 영상을 사용하고 낸 저작권료가 20억 원 정도 공탁돼 있다.
▷북한의 인권범죄에 대한 형사처벌은 현재로선 사실상 집행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개인이 피해 구제를 위한 민사소송에 나서면서 북한에 상당한 압박이 되고 있다. 북한에 여행을 갔다가 1년 넘게 억류됐던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2017년 6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으나 곧바로 숨졌다. 이듬해 그의 가족은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해 5억 달러(약 5800억 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 냈다.
▷물론 북한은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웜비어 가족은 미국 정부가 압류한 북한 선박(와이즈 어니스트)의 소유권을 주장해 이를 매각했다. 스위스 계좌, 독일의 호스텔 등 세계 곳곳 북한의 재산을 찾아내 응징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앞서 2015년에도 미국 법원은 북한 인권범죄에 징벌적 손해배상금을 물린 적이 있다. 탈북자를 돕다 북한에 납치돼 사망한 김동식 목사의 유족이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3억3000만 달러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미국 법정에서 웜비어의 어머니는 “우리는 이제 무서울 것이 없다. 북한이 한 짓에 대해 절대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납북자 가족들이 가족을 되찾으려는 절박한 싸움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북한이 두려움을 느끼고 침묵하는 것 같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생명과 권리를 소중히 여기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잠시 퇴보하는 듯해도, 어떤 독재자도 그 흐름을 거스르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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