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전북 진안에서 저소득층 대상 도시락 배달에 참여한 30대 자원봉사자 김정민 씨는 행복도시락협동조합 관계자로부터 이 같은 부탁을 듣고 걱정이 밀려왔다. 진안 지역 지리에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시락 배송 차량도 평소 몰던 차와 달랐기 때문이다. 자칫 배달이 지체돼 아이들의 점심이 늦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배달을 시작한 지 몇 분 되지 않아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당일 배달할 리스트와 배달 순서, 최적 경로까지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통합배송관리 시스템이 배달차량에 장착됐기 때문. 실제로 김 씨는 초보 자원봉사자들이 보통 6시간가량 걸리는 배달을 5시간 만에 끝냈다. 김 씨는 “중간에 배달자가 변경되거나 교통상황이 변하면 자동으로 배송 순서와 경로가 바뀌었다”며 “사회공헌 활동에도 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이 깊숙이 침투된 것을 직접 경험하니 무척 신기했다”고 말했다.
사회적 기업인 행복도시락은 2006년부터 사회문제 해결 네트워크인 행복얼라이언스와 함께 아동 결식을 해결하기 위한 도시락 배달 사업을 진행해왔다. 저소득 계층은 물론이고 차상위계층, 편부모가 일해 낮에 홀로 지내는 아이 등이 주요 대상이다. 지난해 하루 평균 약 1만 명의 아동에게 연간 약 250만 개의 행복도시락이 배달됐다.
특히 행복도시락은 전국 29개 행복도시락센터, 교육청, 지역아동센터, 다문화가정지원센터, 지방자치단체, 기업 등 다양한 주체들이 하나의 사회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집합적 임팩트(Collective Impact)’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자금 모금, 도시락 제작, 배송, 사후 관리 등 단계별로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해 행복도시락 사업이 질적으로 한 단계 발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도시락 배달 최적화를 위해 개발된 통합배송관리 시스템은 SK텔레콤이 모바일 내비게이션 T맵을 활용해 자체 개발한 시스템을 행복도시락에 적용한 것이다. 통합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배송시간은 10% 이상 단축됐고, 전체 도시락 비용의 10%를 차지하는 배송비용도 줄었다. 도시락 받을 학생 수가 갑자기 늘거나 신규 자원봉사자가 투입돼도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다. 아동 부재, 주소지 변경으로 인해 도시락이 배달되지 못한 사례도 자동으로 산출되는 등 사후관리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행복도시락 전북 진안센터의 김치훈 센터장은 “인력에만 의존해 주먹구구식으로 도시락을 배달하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며 “ICT가 실제 아이들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영양 높은 도시락을 제 시간에 배달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행복도시락을 만들기 위한 자금 모금에는 한성기업, 멕시카나, 어스맨, 아름다운커피, 마노컴퍼니, 동구밭, 비타민엔젤스, 슈퍼잼, SK스토아, 제이준코스메틱 등 10개 기업의 기부연계 상품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각 회사가 자발적으로 기부연계 상품을 만들고, 판매금의 일정비율을 아동 결식을 위한 기부금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지난해 10개 기업의 기부전용 상품 매출이 700억 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홈쇼핑 채널을 운영하는 SK그룹 계열 SK스토아는 매달 일정 금액 이상을 구입하는 고객에게 적립금과 함께 별도의 기부금을 지급하고 있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서는 고객 개개인의 기부금 명세를 보여주면서 기부를 독려하고 있다. 실제로 기부연계 상품을 구매한 고객의 재구매율은 지난해 35.7%로 2018년(27.1%)보다 늘어났다. SK스토아 관계자는 “기부연계 상품을 구입하는 윤리적 소비자들은 재방문율과 재구매율이 높다”며 “기업들이 자체 사회공헌 활동뿐 아니라 마케팅 측면에서도 기부연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 도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행복도시락은 단순 지원을 넘어 아동 영양불균형 문제 해결을 위한 식생활 교육도 강화하고 있다. 약 35만 명의 아동이 정부로부터 하루 5000원 내외의 식사 지원금을 전자카드로 지급받고 있지만, 한 번에 1일 급식비를 초과하는 돈을 쓰거나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는 등 영양적으로 문제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대 식품영양과학연구소에 따르면 급식 지원 아동은 비지원 아동에 비해 비만 비율이 1.6배 높다. 이에 행복도시락은 자원봉사자들을 직접 아동에게 찾아가게 해 식생활 개선 교육을 시키거나, 방학 중 식생활 캠프도 진행한다.
행복얼라이언스 관계자는 “도시락 배달을 넘어선 다양한 프로그램, 정보기술과의 결합을 통한 기부 확대 등은 하나의 기업 또는 기관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집합적 임팩트 방식이 국내 사회공헌 사업의 진화를 견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 “참여자 다양한 사회공헌사업, 시너지 크고 효율적” ▼ 신현상 한양대 교수 인터뷰 “기존 대기업 공헌사업은 투입 위주… 수혜자에 미치는 산출효과 집중을”
“기존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은 ‘투입(Input) 위주’였다. 이제는 한 단계 나아가 수혜자에게 미치는 실제 영향에 집중하는 ‘산출(Output) 위주’로 전환해야 한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혁신기업의 역할을 연구하는 신현상 한양대 교수(51·경영학·사진)는 2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한국 기업의 사회공헌 사업들이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기업들이 ‘집합적 임팩트(Collective Impact)’ 방식을 더 확대하면 사회공헌 사업의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업들이 특정 프로그램에 들어간 예산, 참여한 임직원 수, 언론 노출 빈도 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프로그램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들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기업이 좋은 일에 적지 않은 돈을 쓰면서도 언론에 노출되면 대중으로부터 ‘마케팅하려고 기부했지?’라는 오해를 받는다”며 “정부, 지역사회, 비영리단체 등과 연대하는 방식으로 사회공헌 사업이 전환되면 이 같은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2016년 만들어진 국내 최대 규모의 사회공헌 연합체인 행복얼라이언스에 대해서는 ‘대기업 사회공헌의 패러다임 전환의 시작점’이라고 평가했다. 신 교수는 “SK가 시작한 행복얼라이언스는 자기만 빛나는 방식이 아닌, 다른 참여자들과 공을 나누고, 참여를 독려하는 방식”이라며 “실제 사회문제 해결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집합적 임팩트’가 기업뿐 아니라 정부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비영리단체나 공공기관들이 사회문제 해결에 열심히는 하지만 효율성과 효과성이 부족한 경우가 종종 있다”며 “일사불란한 기업의 경영효율성이 정부 중심 사회공헌 사업을 혁신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미국보다 ‘집합적 임팩트’ 방식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은 환경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신 교수는 “집합적 임팩트는 기본적으로 공공과 민간이 협력하는 모델인데, 미국은 상대적으로 정부보다는 지역사회가 주도한다”며 “정부의 역할이 큰 한국은 민관 시너지를 내는 데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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