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과 권상우[이승재의 무비홀릭]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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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우 주연의 영화 ‘히트맨’.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권상우 주연의 영화 ‘히트맨’.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흥행 중인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가장 싫어하는 건 직장인들이란 소리가 있어요. 그 지긋지긋한 ‘부장’을 영화에서 또 봐야 하느냐는 거죠. 하지만 영화에서 중앙정보부장으로 나오는 이병헌은 보아도 보아도 안 지겨워요.

이병헌은 대단한 배우예요. 한석규 이후 영화와 TV 드라마 모두에서 최고 자리를 이어가는 배우는 거의 없거든요. 장동건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모두 잘 안 되고 있고, 주진모와 송중기는 톱이라고 보기엔 성공의 업적이 모자라며, 정우성과 조인성과 강동원은 드라마에 요즘 나오질 않고, 이정재는 명성에 비해 의외로 ‘빵’ 터진 작품이 많질 않으며, 이성민은 드라마에선 훌륭한데 영화는 아무거나 막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QC(품질관리)가 되질 않잖아요? 게다가 이병헌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싱싱하고 멋진 외모까지 겸비하는 바람에 ‘미스터 션샤인’ 같은 드라마에선 스무 살 아래 여배우 김태리와 애정관계라는 금자탑까지 쌓았어요. 그래서인지, 저도 종종 이병헌에 비유되곤 해요. 글 잘 쓰고 말도 잘하는 데다 얼굴까지 되는 ‘수륙양용’ 아니 ‘삼위일체’의 제 능력치가, 드라마도 잘하고 영화도 잘하는 이병헌과 거의 똑같다고들 난리인데, 겸손한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병헌의 진짜 훌륭한 점은 연기라는 업(業)을 바라보는 애티튜드에 있어요. 남산의 부장들 원작자인 김충식 가천대 교수(전 동아일보 기자)를 얼마 전 만났다가 깜짝 놀랄 얘기를 들었거든요. 김 교수의 원작을 영화로 만드는 것에 대한 허락을 구하려 우민호 감독이 자신을 찾아왔었는데, 이병헌이 함께 왔다는 거예요. 보통 톱 배우들은 초기 기획단계에선 나서는 법이 없거든요. 그만큼 이병헌 스스로가 자신을 ‘구름 위 별’이 아니라, 배우라는 직업인으로 본다는 사실을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지요. 게다가 이병헌은 독야청청 자기만 빛나는 캐릭터는 잘 안 해요. 하정우(백두산), 김윤석(남한산성), 강동원(마스터), 조승우(내부자들), 최민식(악마를 보았다)처럼 대단한 상대와 대척점에 서는 역할을 선호하죠. 자기만 잘나봐야 소용없고, 캐릭터들의 갈등 에너지가 빚어내는 영화적 완성도가 종국엔 자신을 더 높은 자리로 이끌어준다는 지혜로운 생각도 갖추고 있지요.

이병헌의 캐릭터 스펙트럼이 무지하게 넓은 이유도, 이런 애티튜드로 설명이 되어요. 그는 사극도 하고, 현대극도 하고, 할리우드 액션무비도 해요. 악당도 하고, 손목 잘린 조폭도 하고, 왕도 하고, 멍청이도 하고, 심지어 유령도 되지요. 특히 ‘그것만이 내 세상’(2017년)에서 복서 출신 동네 백수 연기는 ‘역대급’이었어요. 영화 ‘똥개’에서 정우성이 어수룩하고 지저분한 동네 청년을 연기하면서도 결국엔 ‘잘생김’을 내려놓는 데 실패했던 사례와는 다르지요. 자신을 완전히 해체해 재구성한 것 같은 모습이랄까요? 이렇게 가다간 이병헌이 나이 예순셋이 되어서도 손녀뻘 옆집 소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다 소녀와 아주 약간의 ‘썸’을 타는 편의점 주인(전직 네이비실 요원)으로 나오는 ‘진짜진짜 아저씨’ 같은 영화도 찍을 것만 같아요.

아, 이병헌을 저와 너무 동일시하다 보니 칭찬 일색이었어요. 그런데 이병헌만큼 훌륭한 배우를 얼마 전 보았답니다. 설 연휴에 할 일이 하도 없어서 할 수 없이 본 영화 ‘히트맨’의 주연배우 권상우이지요.

원래는 이 영화, 안 보려 했어요. 제목부터 뭔가 구리잖아요? ‘엑스맨’의 울버린을 패러디한 모습에다 ‘다 그려버리겠어!’란 문구가 새겨진 포스터를 보는 순간, 왠지 쓰레기종말처리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확 받았거든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영화도 재밌고, 액션도 끝내주고, 가족애라는 감동도 살아있더라고요. 권상우는 따지고 보면 정말 잘생기고 연기도 잘하는 배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영화는 기대치가 늘 높지 않아요. ‘초딩스럽다’는 선입견이 있지요. 그러나 막상 용기를 내어 영화를 보면 재미가 넘치는 혁명적 현상이 일어나요. ‘동갑내기 과외하기’ 이후 메가 히트는 없지만 ‘탐정’ 시리즈나 ‘신의 한 수: 귀수편’처럼 200만∼300만 관객을 모으는 영화들이 꾸준히 나오는 이유예요.

권상우는 700억 원대 부동산 부자로 알려져요. 그의 영화를 찾는 우리보다 수백 배 자산가예요. 하지만 영화 속 그를 보고 있노라면 1000원짜리 하나 던져주고 싶은 동정심이 용솟음치잖아요? 그래요. 잘생긴 배우는 널렸지만, 잘생기고 지질한 배우는 지구상에 권상우 하나뿐이에요. 그는 좀 모자란 캐릭터를 선호하면서도 청룽(성룡)처럼 액션배우로서의 커리어와 비전을 잃지 않아요. ‘날 아무리 유치하게 생각해도, 이게 나야! 난 이게 좋다고!’라는 확신이 분명하지요. 권상우 자체로 브랜드가 되었어요.

오래전에 잘생기고 연기 못하는 남자배우랑 일식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의 이런 고백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저의 얼굴을 넘어서고 싶어요.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어요.” 그땐 무슨 배불러 터지는 얘긴가 하고 무시했지만, 이병헌과 권상우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두 배우야말로 얼굴을 진짜로 넘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이에요.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남산의 부장들#이병헌#권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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