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1학년 A 군(16)이 처음 도박에 손댄 건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평소 어울리던 친구들이 학교에서 스마트폰으로 게임하는 걸 지켜보다가 문득 ‘딱 한 번만 해볼까’란 생각을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그냥 버튼 몇 개만 누르면 돈을 걸 수 있었다.
처음엔 큰 재미를 못 느꼈던 A 군의 맘이 바뀐 건 친구가 입고 온 P사 재킷을 본 직후였다. 용돈 6개월 치를 모아도 살 수 없는 명품 브랜드 제품이었다. 친구는 “한 방만 터지면 떼돈을 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잠시 망설이던 A 군은 은행계좌와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하고 불법 도박 사이트 회원이 됐다.
최근 10대들의 불법 도박 중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지고 있다. A 군의 사례는 결코 ‘몇몇’의 극단적 일탈이 아니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와 경찰 등에 따르면 수도권 중고교는 반 평균 최소 대여섯 명, 많게는 절반이 넘게 스마트폰 불법 도박을 해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관리센터는 지난해 도박 문제로 상담을 받은 청소년이 1459명이라고 밝혔다. 2014년 89명이었던 숫자가 겨우 5년 만에 약 16배로 증가했다.
○ 노름판으로 변해 버린 교실 책상
도박이란 늪에 빠진 대다수 청소년처럼 A 군도 처음에는 재미 삼아 해보고 돈을 좀 잃으면 관두겠다는 생각을 했다. 열심히 머리 굴릴 필요가 없는 데다, 딴 돈을 금방 입금해주는 점도 매력이었다. 며칠을 1만, 2만 원씩 잃기만 하던 A 군에게 갑자기 원금의 5배에 이르는 배당금이 떨어졌다. 겨우 버튼 몇 번만으로 몇십만 원을 벌다니. A 군의 머릿속엔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고 한다.
“아빠는 매일 야근하면서도 고작 월 300만 원쯤 번다는데. 돈 버는 거 아무것도 아니네.”
도박이 선물한 ‘돈맛’은 달콤했다. 갑자기 생긴 목돈은 소심했던 A 군의 성격마저 바꿔놓았다. 값비싼 운동화에 명품 의류까지. 부러워하는 친구들에게 호기롭게 만찬도 베풀었다. 소셜미디어에 도박으로 번 돈다발을 과시하는 인증 사진을 올리며 유명 래퍼 흉내도 냈다.
A 군의 갑작스러운 변신은 전염성이 강했다. 그가 처음 도박에 손댄 것처럼 한 명씩 한 명씩 A 군을 따라 게임에 빠져들었다. 많을 땐 20∼30명이 함께 불법 도박을 했다. 도박이 교실의 또 다른 일상이 되면서 A 군보다 돈을 더 번 친구들도 생겨났다. 왠지 마음이 조급해진 A 군. 베팅 액수는 잘금잘금 늘어갔다. 또 다른 신종 게임에 손대기 시작한 건 그때쯤이었다.
상황이 심각하단 걸 깨닫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 있었다. 수십만 원에서 시작한 빚은 채 며칠 지나지 않아 수백만 원으로 커졌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원금의 50%가 이자로 붙었다.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에 한창 사 모았던 명품들을 대부분 처분했는데도 빚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챙기던 ‘일진’들이 A 군을 찾아왔다. “네가 못 갚으면 네 엄마를 찾아가서 받아내겠다”고 협박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한 번만, 한 번만 더 잭팟을 터뜨리면 되는데…. ○ 초등학생에게도 드리운 검은 그림자
A 군 이야기는 지난해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에서 상담받은 실제 사례다. 그는 10대 청소년이 도박에 빠져들고 결국 중독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아주 전형적인 케이스다.
관리센터에 따르면 청소년 도박은 90% 이상이 ‘호기심’으로 시작한다. 2018년 청소년 도박 문제 실태조사에서 60%가량의 청소년들은 ‘재미와 호기심에’ 돈내기 게임을 시작했다고 응답했다. 온라인 광고나 홍보 문자를 우연히 클릭했다가 도박에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 10대들이 즐겨 찾는 소셜미디어 채널에선 이런 광고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몇몇 유튜버는 천기누설이라며 불법 도박의 노하우를 담은 동영상을 띄워 유혹하기도 했다. 유튜버 C 씨는 “온라인 도박에서 딴 돈으로 최근 고급 외제차를 구입했다”며 꼬드기기도 했다.
10대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친숙한 ‘게임 형태의 도박’에 잘 빠져든다. 성인들이 주로 하는 ‘불법 스포츠 도박’은 게임 분석을 위한 사전 지식도 필요하고 결과도 비교적 오래 걸린다. 반면 단순 게임 스타일의 도박들은 규칙이 간단한 데다 빠르게 승패가 갈린다. 청소년들이 주로 하는 온라인 도박은 성인 인증 절차 자체가 없고 계좌와 휴대전호 번호만 있으면 가입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도박을 즐길 수 있다.
관리센터 관계자는 “스마트폰에 익숙한 아이들은 1, 2분만 들여다보고도 금방 도박 룰을 배운다”며 “게다가 게임형 도박은 수익금도 금방 입금되기 때문에 더 유혹이 크다”고 경고했다.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자들이 최근 재미를 더한 게임 형태의 온라인 도박을 잇달아 내놓은 것도 10대들을 끌어오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도박에 빠지는 연령은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다. 몇 년 전만 해도 고교생 위주였지만 최근엔 중학생뿐만 아니라 초등학생이 도박 중독에 빠진 사례도 나오고 있다. 관리센터의 2018년 청소년 도박 문제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학교 입학 전에 이미 게임 도박을 경험했다고 답한 비율이 무려 69%였다. 액수도 적지 않다. 같은 조사에서 도박을 한 청소년 1인이 평균 3개월 동안 불법 도박에 쓴 돈은 약 40만3140원이었다.
○ 폭력과 절도, 2차 범죄로 번지는 도박
도박 중독은 또 다른 범죄의 늪으로 아이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일부 학교에선 사채업을 방불케 하는 ‘이자놀이’가 성행하고 있다. 소위 일진들이 중심이 된 교내 모임이 만들어져 전문적으로 도박 자금을 빌려준다. 관리센터에 따르면 이런 ‘10대 대부업자’들은 하루만 돈을 갚지 않아도 ‘지각비’라며 이자를 원금의 50%나 받아내곤 했다. 법정 최고금리인 연 24%를 훌쩍 뛰어넘는 불법 행위지만 아이들은 이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자금이 궁해진 아이들이 범죄에 손을 대는 경우도 벌어졌다. 경찰 등에 따르면 절도나 폭력 혐의로 붙잡힌 10대 가운데 상당수가 “도박 빚을 갚으려고” “판돈을 마련하려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털어놓는다고 한다. 관리센터에 접수된 상담 사례 중에는 돈을 갚지 못해 두들겨 맞았단 고백도 많다.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사기를 치다가 걸린 케이스도 있다. 한때 도박을 탐닉했던 D 군(18)은 “허위 매물 거래는 도박에 중독된 애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라며 “소셜미디어로 소액 대출을 받다가 갚지 못해 ‘성인 사채업자’에게 곤욕을 치른 친구도 있다”고 귀띔했다.
전문가들은 극단적인 물질주의가 10대들에게 퍼지면서 불법 도박이나 관련 범죄도 늘어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성인에게 만연한 극단적 물질주의와 한탕주의가 어린 청소년에게도 확산된 사회적 병리현상”이라고 개탄했다. 구 교수는 또 “21세기 디지털 시대가 양산한 부작용이란 측면도 크다”며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세대일수록 이런 영향을 받기 쉬운 만큼 정부와 교육당국이 적극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전문가들은 도박 중독은 혼자 해결하기보다는 전문 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청소년 도박 관련 상담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에서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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