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9명의 에세이를 싣습니다. 작가의 출발선에 선 이들의 글에서 추위를 녹이고 다가올 봄의 싱그러운 내음을 조금 일찍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오후에는 아버지를 뵈러 요양병원에 갔다. 선유도공원 근처에 있는 그곳에 가기 위해 주말마다 자유로를 달렸다. 4년여 이어지던 그 일정에 변화가 생긴 지 어느덧 한 달이 넘어간다. 이제는 “어떻게 왔니” 하고 묻는 아버지 앞에서 헤실댈 일도 없고, 아버지의 손톱을 깎다가 “저도 눈이 침침해지네요” 하고 앓는 소리를 늘어놓을 일도 없다.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해도 어떤 상실 앞에서는 결국 휘청거리게 되는 모양이다. 언제부터인가 주말 오후가 되면 나는 미관광장 일대를 공연히 서성인다. 여동생들과 만나 병원을 향해 출발하던 지점이 으레 그 부근이었다. 우리는 근처 대형마트에서 바나나와 두유 등을 사서 트렁크에 옮겨 싣고 가속페달을 밟고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현저히 줄어든 속도로 하릴없이 도보할 뿐이다. 그렇듯 목적 없는 걸음은 호수공원으로도 이어지고, 또 어느 날은 정발산 아래 아람누리도서관까지 닿는다.
다행히 빛은 어디에도 있어 구석진 서가 사이에서도 나는 흰 종이에 쓰인 검은 글자들을 모조리 다 읽어낸다. 이즈음 그렇게 만난 책이 고(故) 김진영 선생의 ‘아침의 피아노’(한겨레출판)다. 강단 밖의 철학자로 알려진 선생의 강의를 나도 한때 온라인으로 수강했다. 소설을 쓰며 시간을 견디던 무렵이었다. 선생은 그때까지 빤하게 읽어왔던 이야기들 속에서 낯선 온기와 깊이를 짚어냈고 나는 그것들을 놓칠세라 부지런히 노트에 옮겨 적었다.
‘아침의 피아노’는 과묵하다. 234편의 글은 짧게는 한 줄, 길어도 사륙판 두 쪽을 넘지 않는다. 작고하시기 전까지 병상에서 쓴 글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인데, 이는 선생 자신이 번역한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와도 흡사한 인상을 준다. 쓰인 것보다 쓰이지 않은 것이 더 많으며 담담히 삼켜낸 말들을 위해 비워둔 자리 또한 여운이 짙다.
“무엇이 기다리는지, 무엇이 다가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것은 열려 있다. 그 열림 앞에서 네가 할 일은 단 하나, 사랑하는 일이다.”(p.105)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선생은 힘주어 사랑을 말한다. 심지어 베란다에서 들려오는 아침의 피아노 소리조차 사랑으로 새겨 읽는다.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응답은 사랑뿐이라는 듯. 그 대목에서 불현듯 나는 오래전 춘천의 작은 주택에서 살던 시절을 떠올렸다.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 앵두나무가 있던 그 세계에서 나 역시 아침마다 낡은 피아노를 두드리고는 했다.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어쭙잖은 야망으로 열 살짜리 아이가 곤히 자던 가족들을 괴롭히던 그때, 누군가도 먼 곳에서 그 서툰 아침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었을까. 어떤 응답의 하나로서 사랑을 떠올리고 있었을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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