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스한 머리의 만화광 청년이 오스카상 탔다는게 아직도 안믿겨
매번 10만 원어치 이상 구입… 日 작품보다 유럽-국내 단편 선호
모아놨다면 창고 하나 가득 찼을것”
1990년대부터 서울지하철 홍대입구역 8번 출구 인근을 지키던 ‘만화 덕후들’의 성지. 만화 전문서점인 ‘한양문고’를 15년 넘게 들락거리던 한 단골이 있었다. 그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다닐 때도, 2000년 첫 장편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구상할 때도 이곳에 있었다. 2005년 그가 구입한 프랑스 그래픽 노블 ‘설국열차(Le Transperceneige)’는 2013년 영화가 돼 세상으로 나왔고, 2020년 그는 오스카 4관왕을 거머쥔다.
감독 이전 만화가, 만화 수집가였던 봉준호 감독을 이곳에서 오래도록 지켜본 김기성 전 한양문고(한양툰크) 대표(61·사진)는 “부스스한 머리로 만화에 심취해 있던 한 청년이 오스카상을 탔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재정난으로 지난해 서점이 문을 닫고, 현재 온라인서점으로 전환하기까지 김 전 대표는 18년간 한자리를 지켰다. 서점에는 “한양문고 덕분에 ‘설국열차’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감사!!!!”라는 봉 감독의 친필 사인과 문구가 자랑거리처럼 걸려 있었다. 봉 감독은 이 만화를 접한 순간에 대해 “나의 위험천만한 영화적 모험은 그때 이미 시작됐다”고 밝혔다.
김 전 대표가 떠올린 봉 감독의 첫인상은 만화에 푹 빠진 평범한 덕후였다.
“고독하게 서점을 찾아와 생각에 잠기던 청년이었어요. 영화감독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가 작품을 구상한다는 걸 알게 됐죠. 골격이 커서 항상 눈길이 갔습니다.”
봉 감독은 매달 서점에 들러 한 시간 이상 책에 빠져들던 과묵한 청년이었다.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여러 책을 끄집어내느라 늘 책장을 어지럽혔어요.(웃음) ‘이 전집 다 주세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신중하게 몇 권을 추려냈죠.”
봉 감독은 매번 10만 원어치 이상 만화책을 사는 ‘큰손’이었다.
“웃음기 없이 무표정한데 사고 싶은 만화책들을 계산대에 아무 말 없이 올려놓을 때는 꼭 오스카상을 탔을 때처럼 함박웃음을 지었어요. 만화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죠.”
봉 감독의 만화 취향은 영화 취향으로도 이어졌다. 나루토, 원피스 등 일본 인기 시리즈보다는 유럽, 국내 작가의 단편을 즐겼다. 김 전 대표는 “확실히 유럽 작가의 단편 만화나 국내 작가들의 향토적, 인디적 작품을 선호했다”며 “평범한 소재에서 독특한 걸 들춰내는 그의 영화를 보면 만화들이 토대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한 출판 캠페인에서 “만화책은 웹툰과 달리 한 장, 한 장 샷을 넘기는 맛이 있다”며 앙꼬 작가의 ‘나쁜 친구’와 찰스 번스 작가의 ‘블랙홀’을 명작 만화로 꼽았다.
봉 감독이 한양문고 단골이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주변 출판인들은 김 전 대표에게 ‘오스카 수상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봉 감독 영화에 제가 기여한 바는 없지만 뿌듯합니다. 만약 봉 감독이 한양문고에서 샀던 만화책들을 안 버리고 모아 놨다면 방이나 창고 하나는 가득 찼을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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