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트 인 타임’→‘저스트 인 케이스’로… 글로벌 공급망 공식이 바뀐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8일 03시 00분


[인사이드&인사이트]제조업 패러다임의 변화

10일 현대자동차 울산 출고센터 전경.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부품 조달에 차질이 발생하자 국내 차량 생산이 중단됐다. 출고센터가 평소보다 한산한 모습니다. 울산=뉴시스
10일 현대자동차 울산 출고센터 전경.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부품 조달에 차질이 발생하자 국내 차량 생산이 중단됐다. 출고센터가 평소보다 한산한 모습니다. 울산=뉴시스
“그전과 같을 순 없습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에게 ‘일본 수출 규제가 완전히 풀린다면 규제 이전의 공급망으로 돌아갈 것인지’를 묻자 그는 이같이 답했다.

“이미 불화수소는 국산화가 진행되고 있고, 해외 다른 구매처도 찾아놨죠.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는 우회 수입 중이고요. 앞으로 ‘예비 재고’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지난해 7월 일본 정부가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소재의 대(對)한국 수출을 규제하겠다고 밝히자 한국은 발칵 뒤집어졌다. 기업마다 구매팀이 일본, 대만, 중국, 미국, 벨기에 등을 헤집고 다니며 대체품을 찾았고, 도매상 창고를 뒤지며 ‘남은 물건 다 내놓으라’며 이삭줍기에 나섰다. 동시에 엔지니어들은 대체품을 테스트하느라 날밤을 새웠다. 가까스로 반도체 공장이 멈추는 최악의 상황은 피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 수출 규제가 시작된 지 7개월 만에 또다시 기업에 폭탄이 떨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세계의 공장’ 중국에서 일어나면서 자동차 기업들이 줄줄이 국내 공장을 멈춰 세웠다. 미중 무역분쟁, 한일 수출 규제로 안 그래도 위기에 처했다는 평가가 나왔던 ‘글로벌 가치사슬’이 코로나19 사태로 실제 끊어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과거엔 당연한 것으로 평가받았던 글로벌 가치사슬 위기는 여러 질문을 던지고 있다. 효율을 추구하기 위해 소량을 주문 즉시 생산하는 ‘저스트인타임(Just In Time·JIT)’ 시대는 끝난 것일까. 기업들은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왜 이렇게 취약할까. 글로벌 자유무역 패러다임이 변했다면 앞으로 공급망 관리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

국내 주요 기업과 요시 셰피 매사추세츠공대(MIT) 트랜스포테이션·로지스 연구센터 및 공급망 관리 프로그램 디렉터 겸 교수, 류종기 IBM 리질리언스 실장 등 전문가에게 답을 구해봤다.

① 왜 중국 공장이 고작 10일 멈추자 한국 자동차 공장도 멈췄을까

이달 4일 현대자동차는 한국 공장 가동을 순차적으로 멈춘다고 밝혔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만도기계 부도 사태 이후 23년 만에 부품 수급 문제로 공장이 멈추는 드문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기아차, 쌍용차, 르노삼성차, GM코리아 공장도 일시 가동 중단에 들어갔다. 17일 현재 현대차 등은 가동을 시작했지만 기아차 소하리 공장 등 일부 공장은 휴업 중이다.

자동차 공장을 세운 건 전선 다발인 와이어링 하니스다. 첨단 부품은 아니지만 싼 인건비 때문에 주로 중국 공장에서 만들어졌고,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되며 최근 열흘 동안 공장이 가동되지 못해 한국으로 공급되지 못했다. 유라코퍼레이션, 경신 등 현대차의 1차 협력사는 2000년대 초반 현대차가 중국에 진출할 때 중국으로 와이어링 하니스 생산공장을 이전했다.

이쯤에서 생기는 의문은, 현대차와 기아차 등은 고작 10일 가동 중단을 견딜 만한 재고가 왜 없었을까.

사실 재고는 비용이다. 저장 공간을 차지하고 관리 비용에다 손실 위험도 있다. 1903년 미국의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벨트를 개발해 대량생산 체제 시대를 열면서 재고가 꾸준히 늘었다. 하지만 1960년대 일본 도요타는 재고를 최소화하는 JIT로 효율 생산 시대를 열었다. JIT는 생산에 필요한 만큼의 부품만 납품받아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반면 완벽한 물류체계가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에 외부 충격에 취약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할수록 JIT는 더욱 진화했고, 글로벌 기준이 됐다. 현대차도 협력사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재고를 최소화하는 효율적 관리 기법을 도입했다. 예기치 않았던 바이러스 사태로 글로벌 기업들의 ‘효율성’이 위협받게 된 것이다.

문제가 된 와이어링 하니스는 차 한 대당 50∼100kg으로 무겁고 부피도 커 재고를 많이 쌓아두기 어렵기도 한 부품이다. 최근 차량이 맞춤형으로 만들어지는 추세라 옵션 주문에 따라 필요한 와이어링 하니스의 모양과 양이 제각각이기도 하다. MIT의 셰피 교수에 따르면 제조업이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가면서 각 품목에 대한 수요 예측이 더욱 어려워졌고, 이는 기업을 돌발 변수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코로나19 사태로 하필 중국에서 80% 이상을 생산하던 와이어링 하니스가 한국 자동차 공급망의 약한 고리가 된 것이다.

② 미중 무역갈등, 수출 규제, 코로나19… 공급망에 무슨 일이

셰피 교수에 따르면 전염병으로 인한 리스크, 금융위기의 공통점은 인적 네트워크와 밀접히 연결된 공급망을 통해 확산된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자동차 부품회사 웨바스토에서만 8명이 코로나19 확진자로 판명돼 최근 2주 동안 회사 문을 닫았다. 중국 상하이 법인 직원이 감염된 줄 모르고 웨바스토 본부로 출장을 갔기 때문이다. 중국에 생산기지를 둔 폭스콘 등 애플 협력업체들은 17일 현재 여전히 정상 가동을 못 하고 있다.

자연재해도 공급망 리스크 요인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태국 홍수, 2016년 일본 구마모토 지진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미중 무역분쟁, 일본 수출 규제 같은 정치적 리스크까지 공급망을 흔들고 있다.

이처럼 공급망 리스크는 커지는데 글로벌 공급망은 더 복잡해지고, 넓어지고, 길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더 취약해지고 있다. 기업이 3차 협력사까지는 잘 알아도 이를 넘어가는, 예를 들어 10차 협력사까지 파악하긴 쉽지 않다. 상식적으로 피라미드형 구조일 것 같지만 다이아몬드형 구조도 의외로 많다고 한다. 9, 10차까지 넘어갔을 때 핵심 원료, 소재는 특정 기업이 독점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셰피 교수에 따르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났을 때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일본으로부터 공급받는 부품 수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3월 14일 1차 협력사를 파악했을 때 390개로 조사됐던 부품이 24일 1551개로 늘었고 29일 1889개, 4월 13일에는 5329개까지 늘었다. 1차 협력사로부터 받은 부품의 코팅 약품이 알고 보니 일본산이었다는 식이다.

셰피 교수는 “한 기업과 지리적으로 상관없는 멀리 떨어진 어떤 곳에서 예상치 못한 충격이 가해지거나 기업 비즈니스와 전혀 상관없는 사건,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글로벌 기업들은 자신 역시 흔들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③ JIT 대신 JIC?

인건비가 많이 드는 와이어링 하니스를 모두 한국에서 생산하고, 반도체 소재도 모두 국산화한다면? 늘어나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결국 소비자가격이 오르고 수출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다. 자유무역 체제의 변화도 비용 상승을 예고하고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미중 무역분쟁이 한창이던 지난해 7월 실제 국가 간 교역이 줄었다며 세계화의 후퇴, 즉 ‘슬로벌라이제이션(Slow+Globalization)’이 가속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기존 글로벌 가치사슬이나 JIT 방식과 완전한 이별을 고할 순 없지만 적정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위기 대응에 나서는 식으로 기업들이 방향을 바꿀 것으로 본다. ‘레질리언스’(회복탄력성)를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Just In Case)’을 위한 예비 재고 및 자원 확보 등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JIT 대신 JIC가 대세가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국내 전자 업계 관계자는 “적정 재고를 얼마로 설정할지는 최고재무책임자(CFO)의 영원한 숙제다. (일본 수출 규제를 경험한) 지금은 비용이 늘더라도 예비 재고 확보, 공급처 다변화처럼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을 논의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진으로 여러 차례 생산 중단 사태를 빚은 일본 자동차 기업이 레질리언스를 강화한 사례도 있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닛산이 14일부터 규슈에 있는 완성차 공장의 2개 생산라인 가동을 일시 중단하긴 했지만 다른 일본 자동차 기업들은 정상적으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도요타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공급망 리스크를 호되게 겪었다. 일본 내 모든 공장 생산을 12일 동안 중단했고, 그해 6월이 돼서야 대지진 이전의 생산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오비린(櫻美林)대학이 발간하는 경영잡지 오비린경영연구에 따르면 이후 도요타는 △공급처 다변화 △공급처와의 관계 강화 △부품 표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과거보다 비용이 더 들더라도 ‘안정적인 부품 조달’에 방점을 찍었다.

국내 부품 공급처를 완성차 생산 공장 인근 업체 중심으로 더 늘렸다. 국내 생산 거점인 도카이, 규슈, 도호쿠 등 3개 지역 가운데 어느 한 곳에서 문제가 일어나더라도 나머지 지역에서는 정상 조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 해외도 마찬가지. 도요타는 해외 공장을 4개 더 늘려 전체 51개 체제로 만들었다.

공급처와의 관계도 강화했다. 3, 4차 이하 소재 및 부품 회사를 포함한 일본 내 약 1500개 부품 공장의 생산품목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1, 2차 협력업체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정보가 거의 없었던 10차 이상 협력업체의 생산 장소까지 파악했다. 부품 표준화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표준화된 부품을 사용하면 설계 및 개발비용이 줄어들고 비상시 대체품을 구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도쿄=박형준 특파원
#일본 수출 규제#미중 무역갈등#코로나19#제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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