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의 윤석열’, 그리고 추미애[오늘과 내일/정원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9일 03시 00분


좌천검사, ‘윤석열 학습효과’로 사표 안 내… ‘추 장관의 꺾고 또 꺾기 전략’, 재고할 때

정원수 사회부장
정원수 사회부장
“앞으로 ‘100명의 윤석열’을 누가 감당할까.”

추미애 법무부 장관 취임 직후인 지난달 두 차례 단행된 이른바 ‘검찰 대학살 인사’에 대해 전직 검찰 고위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 등 ‘살아있는 권력’ 수사를 지휘하던 윤석열 검찰총장의 참모진과 수사팀 검사를 지방으로 좌천시켜 ‘제2의 윤석열’이 100명 정도 생긴 것 아니냐는 것이다. 윤 총장 1명도 현 정부가 감당하기 버거워하는데, 윤 총장처럼 타협하지 않는 검사 여러 명을 훗날 어떤 권력이 상대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섞여 있는 탄식이었다.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이번 인사가 권력 수사에 대한 방해 아니냐는 비판에 “사표를 내는 분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며 큰 반발이 아니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좌천된 인사 중 일부는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위리안치(圍籬安置)’를 언급했다고 한다. 집 주변을 둘러싼 가시 울타리에 갇혀 지내야 하는 위리안치는 조선시대 당쟁으로 유배된 유학자에게 내려진 형벌 중 가장 강도가 높은 것이었다.

가혹한 처사라는 억울함에도 좌천된 검사는 왜 사표를 내지 않고, 검찰에 남아 있을까. 한 검찰 간부는 ‘윤석열 학습효과’라고 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 댓글 조작 사건 수사를 놓고 정권에 맞서다가 지방으로 좌천됐던 윤 총장은 옷을 벗지 않고 끝까지 검사로 남았다. 결국 정권 교체 뒤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영전해 적폐청산 드라이브의 최일선에 섰고, 검찰총장에도 발탁됐다. 권력에 치받다가 수모를 당하면 사표를 던지는 것으로 저항하던 선배 검사들과 달리 ‘제3의 길’을 연 것이다.

검찰개혁을 지상과제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가 ‘검사(檢事)주의자’ 윤 총장을 요직에 발탁한 것은 동료 검사들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윤 총장의 원칙 수사를 이겨낼 수 있다는 정권의 자신감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검찰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윤 총장은 취임 직후 “무슨 여한이 있겠냐. 직분에 최선을 다하자”고 했다. 조국 사태 등 권력층이 민감해하는 수사를 할 때 여권이 검찰을 비판하자 윤 총장은 “그간 정치권을 편들어 오면서 일한 적이 없다”며 후배들을 다독였다고 한다. 국정농단 사건 등을 떠올리며 “검찰이 정권을 감싸고돌면 정권이 진짜 민심과 멀어질 수 있다”며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그런데도 추 장관은 취임 이후 검찰 내부의 상실감은 무시하고, 강공 일변도로 밀어붙이고 있다. 윤 총장의 의견을 듣지 않고 검찰 인사를 단행했고, 전·현직 청와대 관계자에 대한 기소를 만류한 데 이어 공소장 공개까지 가로막았다. 21일에는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의 판단 주체를 분리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7년 만에 장관 주재 전국 검사장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 불참하는 윤 총장은 “수사와 기소는 한 덩어리”라며 이미 후배 검사장들을 향해 반대 메시지를 던졌다. 선거를 앞두고 장관과 검찰이 또 한번 충돌할 수 있다.

지난달 10일 대검에서 열린 검찰 신년동우회에서 한 전직 고위 간부는 “‘유경백별우신지(柳經百別又新枝·버드나무는 백번 꺾여도 새 가지가 난다)’라는 말이 있다”며 후배 검사들을 위로했다. “진짜 검사가 되라”는 조언을 주변으로부터 받고 있는 좌천 검사들은 결기를 더 키운다고 한다. 이런 시점에 검찰 사무의 최고 책임자인 법무부 장관이 검찰을 꺾고 또 꺾기만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냉정히 따져봐야 한다. 여당 내부에서도 “시시비비를 떠나 권력에 맞서는 것 자체에 박수 치는 것이 보통 사람의 정서임을 왜 모르는가”라며 추 장관에게 더 낮아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윤석열#추미애#검찰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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