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홍수 시대[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9일 03시 00분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홍수로 쏟아지는 물은 탁합니다. 맑은 물을 얻으려면 가두어 놓고 가라앉혀야 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넘쳐나는 말 속에 쓰레기도 있고 보석도 있겠지만 가두어 놓고 가라앉혀야 걸러낼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TV부터 켭니다. 이 방송, 저 방송 살펴보다가 일단 한곳에 고정합니다. 마음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들려오는 말들에 자극을 받습니다. 주로 ‘진부(陳腐)’하게 들려서인데, “사상, 표현, 행동 따위가 낡아서 새롭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되고, 듣지 않아도 지장이 없는 말들이 홍수처럼 쏟아집니다.

말이라는 음성 신호를 만들고 전달하는 일은 쉽습니다. 입을 열고 혀를 굴려 뱉으면 말은 공기의 흐름을 타고 전해집니다. 생각이 소리로 나온 것이 말이어서 여러 종류의 말이 있습니다. 정신분석가인 저는 낭비적인 말과 쓸만한 말로 나눕니다. 말은 듣는 사람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분석을 받는 사람의 말이 지루하게 들리면 저항과 방어를 생각합니다. 수치스럽거나 두려워서 생각을 드러내기 힘들어한다고 읽습니다. 귀중한 시간, 한 시간 내내 백화점 쇼핑 이야기만 한다면 마음의 갈등을 말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분석가가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할지를 두려워하는 겁니다.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합니다. 난감하지만 있는 그대로 다룹니다.

말을 듣고 말을 하는 직업을 가진 저는 일상에서도 말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너무 앞세우는 말을 들으면 말을 잃습니다. 말할 것도 없는 말을 자꾸 하면 지루합니다. 말 뒤에 복선(伏線)이 깔려 있다고 느끼면 짜증이 납니다. 상투적인 말은 시시하게 들립니다. 스스로 생각이 부족하다는 점을 고백한 겁니다. 먹다가 남은 음식을 손님에게 내놓는 것과 같습니다. 날카로운 말이라고 꼭 멋있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악의적인 의도가 엿보이면 화가 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면 참기 어렵습니다.

말 아닌 말, 궤변이 세상에 넘칩니다. 말이 없어도 아는데 말도 아닌 말을 하면 모르겠습니까? 궤변은 방어할수록 말이 보태지면서 자기모순에 빠져 스스로 정체를 드러냅니다. 말만 잘하면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엉뚱하게 해서 빚을 키우는 사람도 너무 많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사죄는 진심을 담아 빨리해야 합니다. 말은 할 탓이어서 단어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탁’과 ‘툭’이 다르고, ‘아’와 ‘어’의 차이가 큽니다. 유창하고 매끄럽게 말을 해도 진실을 가리면 빈 소리가 납니다. 앵무새 같은 말은 화를 부릅니다. 교묘하게 말을 맞추어서 가려도 결국 드러납니다. 행동을 분석하면 말이 숨긴 진실이 밝혀집니다. 때로는 침묵이 금(金)입니다. 말이 많으면 실언이 많고, 쓸 말도 적습니다. 안정된 사회는 각자의 마음 챙기기가 모인 제대로 된 말과 침묵, 성찰의 결과입니다.

입에서 입으로 샘물처럼 말이 전해지던 시대와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으로 연결된 지금은 의사소통의 차원이 다릅니다. 내가 한 말이 다수에게, 급속으로 전달되는 ‘말의 홍수’ 시대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말을 퍼뜨리기 좋은 시대가 왔지만, 그에 따르는 부작용도 엄청난 규모와 속도로 늘어났습니다. 원하지 않았으나 말이 씨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 시대에는 기억력이 좋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자기가 한 말을, 말한 입에 침도 마르기 전에 뒤집게 되는 힘든 일이 생깁니다. 말만 앞서지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람으로 매도될 수도 있습니다.

말이 흔한 세상이지만 잘 듣는 사람은 드뭅니다.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상대방을 해치려고 말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니 민주화가 충분하지 않은 사회나 직장에서는 할 말을 못 하고 눈치를 보며 말을 삼키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말 많은 세상에서 말 한마디에 천금이 오르내리고 천 냥 빚도 갚으니 말만 잘해서 승승장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말 한마디로 대포알 만 개도 당하는’ 담대하고 용기 있는 인재나 뜻이 있고 뼈가 있는 말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설령 나타나도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들이, 특히 가상공간을 이용해 쏘아대는 무차별 포화(砲火)에 상처를 입습니다. 말로 세상을 구하기는 힘들다고 해도 한마디 제대로 된 말이 세상을 구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작은 행동의 시발점이 될 수는 있습니다.

말은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한 말을 그 사람이 지키지 않아도 도리가 없습니다. 이전에 한 말을 바꿔도 역시 그러합니다. 말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는 세상이지만 말이 되는 소리를 자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감동을 주는 신중하고 무거운 말이 가끔이라도 들려오면 행복하겠습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텔레비전 시청과 음악 방송을 동시에 틀어 놓으려 합니다. 그런데 음악 방송 역시 음악보다는 말이 많아서 고민입니다. 프로그램에 제대로 배치되고 정교하게 수행된 ‘쉼표’는 음악이 주는 감동의 증폭으로 이어집니다. 방송 중간중간에 침묵의 공간을 불허하며 쏟아지는 말들은 감동의 잔향을 지워 버리니 말의 홍수 시대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을까 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말의 홍수#침묵이 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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