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신변이 지난달 11일 이후 20일째 확인되지 않으면서 국제사회의 시선이 온통 한반도로 쏠리고 있다. 청와대는 여전히 ‘특이 동향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미국 워싱턴 조야에선 김 위원장 신변 이상설은 물론 이에 대비한 급변사태 시나리오가 보다 구체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김정은 체제에서 고도화된 북한의 핵무기와 핵시설에 대한 통제권은 동북아 안보 지형을 뒤흔들 수 있는 이슈인 만큼 김 위원장이 이전에 잠적했을 때와 달리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 검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북한의 체제 변화로 인한 후폭풍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김정은 잠적 하루 전 김여정 2인자 굳혀
2011년 12월 집권한 김 위원장이 20일 이상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이번이 여섯 번째. 집권 첫해인 2012년 6월 7일∼7월 1일 23일간 종적을 감췄던 것이 첫 장기 잠행. 최장 잠행은 2014년 9월 4일부터 10월 14일까지 40일간이다. 김 위원장은 9월 3일 모란봉 악단 신작 음악회 이후 10월 14일 지팡이를 짚고 평양 시내 과학자 주택단지 완공 현장에 나타날 때까지 두문불출했다. 당시에도 뇌사설과 실각설 등 갖가지 추측들이 쏟아졌으나 김 위원장은 다리 수술을 받고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의 장기 잠행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지난해 이후 잦아지고 있다. 하지만 20일째 이어지고 있는 이번 잠적이 어느 때보다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과거와는 여러모로 다른 포인트가 있기 때문이다. 건강 이상설과 맞물려 잠적한 것은 다리 수술을 받은 2014년 9월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잠적 때처럼 당시에도 노동신문 등 북한 매체들은 김 위원장의 사진을 싣지 않았다.
김 위원장이 잠적하기 하루 전인 지난달 11일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정치국 후보위원에 복권시킨 것도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2017년 10월 처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임명됐던 김 부부장은 지난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노딜에 책임을 지고 후보위원에서 해임된 바 있다. 미 상하원에 의사 결정을 위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미 의회조사국(CRS)은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업데이트한 대북 관련 보고서에서 “김 위원장은 수년간 다양한 건강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김 위원장 유고 시 김 부부장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특히 북한의 핵무기와 핵시설이 고도화된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장기 잠적했다는 점도 과거와는 다른 점으로 꼽힌다. 올해 1월 말에서 2월 중순까지 21일, 지난달 11일 당 정치국회의 전까지 19일간 공개 활동 공백기가 있었지만 건강 이상설이 불거진 이후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은 2017년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5형을 쏘아 올린 뒤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상태다. ‘하노이 노딜’ 이후에도 미국과의 비핵화 대화 가능성을 열어뒀던 지난해와 달리 김 위원장은 올해 신년사를 대체한 노동당 전원회의 보고에서 “충격적인 실제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위협한 바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김정은이 사실상 핵가방을 들고 잠적한 지 20일째”라며 “미국이 동북아에서 운용하는 정찰 자산 전부를 거의 쏟아붓고 있는 것도 김정은 부재 시 ICBM 등 고도화된 핵무기에 대한 통제 이슈가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일각에선 김 위원장의 신변에 실제로 변화가 있을 시 핵 통제권이 강성 군부의 손으로 들어갈 경우 한반도 상황이 더욱 복잡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 정부가 김 위원장 건강 이상설과 관련해 연일 비핵화 약속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 내부에서 리더십과 관련해 어떤 일이 일어나든 우리의 임무는 그대로”라며 “김 위원장이 싱가포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했던 ‘북한의 검증된 비핵화’ 공언은 이행돼야 한다”고 했다.
○ 트럼프 “김정은 상황 알지만 말 못 해”
이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 신변을 놓고 각종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1일 대만 언론에 따르면 추궈정(邱國正) 대만 국가안전국(NSB·국가정보원 격) 국장은 입법원(국회) 외교국방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김 위원장에게 병이 발생한 것이 확실하냐’는 질문을 받고 “맞다”고 답했다. 탈북자 출신인 지성호 미래한국당 당선자는 “북한 내부 소식통을 통해 김 위원장이 지난 주말 사망한 것으로 확인했다”며 “김 위원장의 사망을 99%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한미 당국은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김 위원장과 관련한 질문에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다”면서도 “그저 지금 당장 김 위원장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원산 일대에서 김 위원장이 움직이는 모습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한미 당국이 포착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미 당국은 지난달 27일 원산에서 김 위원장으로 보이는 모습을 추가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다방면의 정보 분석을 거쳐 해당 인물이 김 위원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High Confidence)’고 판단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달 30일에는 승마를 마친 일행이 마구간으로 들어가는 뒷모습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미 행정부 관계자는 “이들 일행 중 김정은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 워싱턴=김정안 특파원 / 도쿄=박형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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