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층층이 쌓인 입체적 존재… 한국사회 단면 압축”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14일 03시 00분


할머니 주제 단편소설 낸 여성작가 3인이 본 ‘나의 할머니’

‘듣기만 해도 찡해지는 그 이름, 할머니!’ 작가들은 각자의 기억에서 빚어진 서로 다른 할머니에 관해 이야기하며 할머니의 모습 속에 담긴 우리 사회의 흔적들을 되짚었다. 왼쪽부터 백수린 윤성희 손보미 작가.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듣기만 해도 찡해지는 그 이름, 할머니!’ 작가들은 각자의 기억에서 빚어진 서로 다른 할머니에 관해 이야기하며 할머니의 모습 속에 담긴 우리 사회의 흔적들을 되짚었다. 왼쪽부터 백수린 윤성희 손보미 작가.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늘 주변 어딘가에 있는 친숙한 존재,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주목받거나 이해받지 못했던 우리들의 할머니. 현재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각종 문학상을 휩쓰는 여성 작가 6명이 ‘할머니’를 테마로 한 단편소설집 ‘나의 할머니에게’(다산책방)를 펴냈다. 11일 오전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이들 중 윤성희(47) 손보미(40) 백수린(38) 작가를 만났다. 청탁이 쏟아지는 인기 작가들이지만 (소설집) 제안이 왔을 때 다들 흔쾌히 응했다. 할머니란 테마가 가진 무한한 매력 때문이었다.》

―할머니란 대상이 특별히 흥미로웠던 이유는 뭘까.

▽윤성희=할머니는 10대부터 60대까지의 특징이 층층이 쌓여있어 재미있는 존재다. 늙은 것이 아니라 층과 격이 있는 것이다. 우울했다가 때론 귀엽기도 하고 여러모로 입체적이지 않나.

▽손보미=색다른 관점에서 여성에게 접근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백수린=맞다. 여성 작가가 할머니의 관점에서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을 쓴다는 건 의미가 있다. 할머니라고 하면 보통 희생을 떠올리는데 그렇지 않은 할머니를 재현해보고 싶기도 했다.

작품에는 각 작가의 개성이 묻어난다. 친할머니 외할머니 이야기도 있지만, 아직 손주는 없으면서 조금씩 나이 들어가는 이들도 나온다. 윤 작가는 복지회관에서 아쿠아로빅을 하며 장성한 자녀들의 연락을 기다리는 평범한 주부의 일상(‘어제 꾼 꿈’)을 아기자기하게 그렸다. 백 작가는 우아한 할머니의 낭만적인 추억(‘흑설탕 캔디’)을, 손 작가는 권위적인 할머니를 중심으로 계층 문제(‘위대한 유산’)를 긴장감 있게 풀어냈다. 윤 작가가 “다들 어떻게 그렇게 자기처럼 썼는지”라고 하자 작가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동의했다.

―각자의 소설 속 할머니가 정말 다른데 서로의 작품을 어떻게 읽었나.

▽윤=다들 잘 썼더라. 귀여운 할머니의 연애소설도 누군가 쓰겠지 했더니 백 작가 작품이 있었고, 고택에 홀로 남은 할머니와 그의 이상한 자부심 같은 것도 욕심나는 이야깃거리였는데 손 작가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잘 살려서 썼다. 써보고 싶지만 내가 잘 풀어내지 못했던 이야기라서 더 재밌게 읽었다.

▽손=윤 선배의 소설에 ‘나도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대목이 있다. 분위기는 다르지만 내 소설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같은 대사가 다르게 읽힐 수 있어 재밌었다. 백 작가 소설도 그의 감성이 잘 묻어나는 몽글몽글한 작품이다.

―작가들의 할머니는 어떤 분이고 소설에는 어떻게 반영됐나.

▽윤=할머니와 가까웠는데도 돌아가실 때까지 이름을 몰랐다. 참 당황스러워 주변에 물어보니 우리 세대에겐 의외로 그런 기억이 많더라. 외가에 가도 외할아버지는 문패가 있으니 보는데 외할머니는 장례식장에서야 이름을 처음 보는 것이다.

▽백=워킹맘이셨던 엄마를 대신해 할머니가 날 키우셨다. 지금이야 조손(祖孫) 육아가 흔하지만 우리 땐 드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60대라면 젊은데 할머니가 정말 나이 드신 분이라고 생각했다. 양가의 할머니는 모두 제대로 배우지 못하셨다. 소설에선 많이 배운 할머니를 상상해서 만들어냈지만, 당신의 것을 내어주고 포기했다는 점에서 결국 우리 할머니와 많이 연결된다고 느꼈다.

각자가 기억하는 할머니에 대한 수다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화투점을 봐주시고 민화투를 함께 치던 할머니, 여름방학마다 찾았던 할머니의 편안하고 따뜻한 품, 혹은 양육을 짊어지고 너무 빨리 할머니가 돼버린 분들. 작가들은 할머니를 회상하면서 “할머니를 통해 한국 사회의 단면을 압축적으로 볼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어쩌면 곁에 있지만 이름이 지워졌던 그들의 삶이 그 무엇보다 더 소설적이라고 말이다.

백 작가는 ‘유연한 할머니’, 윤 작가는 ‘너무 진지하지 않은 귀여운 할머니’, 손 작가는 ‘전력을 다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단다. 백 작가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각양각색의 할머니를 만나면서 독자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할머니의 모습을 찾아본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나의 할머니#윤성희#손보미#백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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