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파[횡설수설/이태훈]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2일 03시 00분


“안티파(Antifa)와 급진좌파 집단이 공공기물 파손을 주도하고 있다. 안티파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하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흑인 남성이 경찰에 뒷목이 짓눌려 사망한 이후 항의시위가 미 전역을 휩쓸자 시위대를 향해 노골적 분노를 표출했다. 시위대를 ‘폭도’ ‘약탈자’라고 비난하다가 한발 더 나아가 극좌파로 규정한 것이다.

▷‘안티 파시스트 액션(Anti-Fascist Action)’의 준말인 ‘안티파’는 특정 단체의 이름이 아니라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극좌파를 통칭한다. 192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스트와 나치를 반대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행동대가 유래다. 세계적으로 파시즘, 백인 우월주의, 네오나치 등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이 느슨하게 연결된 경우가 많은데 미국에서 소규모 그룹으로 회의가 열리기는 하지만 공식 리더나 본부는 없다.

▷트럼프는 대도시 시위에서 외지인들이 대거 체포된 점을 근거로 내세우지만 테러조직 연계 근거는 대지 못하고 있다. 극좌파 규정을 통해 공권력 남용으로 빚어진 흑백 갈등을 ‘이념 대결’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트럼프의 강경 대응은 2017년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극우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폭력시위로 3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치는 유혈사태가 났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당시 트럼프는 ‘폭풍 트윗’을 날리던 평소와 다르게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곤 “한 이야기(폭력 사태)를 놓고 두 편이 있다”며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두둔하는 듯한 입장을 냈다.

▷과거 미국에선 경찰의 부당한 총격 등으로 흑인들이 죽어나가도 며칠간 평화시위를 벌이다 잦아들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곳곳에서 약탈과 방화까지 자행되고 있다. 워싱턴에서 시위대들이 밤에 백악관으로 몰려들자 트럼프 대통령은 테러 같은 국가위기 상황에 몸을 숨기는 지하벙커로 가족들과 함께 피신했다. 대통령 경호를 맡는 비밀경호국 차량도 3대가 성난 시위대에 의해 파손됐다.

▷2015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흑인교회에서 백인 청년의 총기난사로 흑인 9명이 숨진 사건 직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추도식에서 갑자기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다. 작사자 존 뉴턴 신부가 흑인 노예무역을 했던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고 잘못을 사해준 신의 은총에 감사한다는 내용의 찬송가다. 미국인들은 순간 당황스러워했지만 이 찬송을 함께 부르며 분노를 가라앉히고 상처를 치유해 나갔다. ‘인종의 용광로’ 미국의 힘은 이런 용서와 화합에서 비롯되는데 요즘은 대통령이 나서 갈등을 부추기니 문제 해결이 더 요원해 보인다.

이태훈 논설위원 jefflee@donga.com
#antifa#안티파#급진좌파#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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