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규정 없는 상임위원장 배분, 13대 이후 여야 타협의 산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13일 03시 00분


[위클리 리포트]‘관행의 세계’ 국회

‘법 vs 관행’

21대 국회가 시작부터 삐거덕대고 있다. 원(院) 구성을 둘러싸고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세게 충돌하면서다. 민주당은 “법대로 하자”고 한다. 국회법대로 상임위원장을 본회의 표결로 뽑자는 거다. 176석 수적 우위를 무기로 법제사법위원회를 포함한 18개 상임위를 모두 가질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103석 통합당은 관행에 호소한다. 정당 의석 비율에 따라 상임위를 배분하고, 야당 소속 의원이 법사위원장을 해오던 국회의 관행을 지키자는 이야기다. 민주당이 야당이던 시절을 언급하며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날을 세운다.

○ 법보다 관행?
실제로 국회는 법을 만드는 곳이지만 다른 어떤 기관보다 법 대신 관행에 따라 운영되는 곳이기도 하다. 정치적 타협과 합의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상임위 배분이다. 한국 국회는 상임위 중심으로 운영된다. 법률안 심의를 상임위에서 하고 본회의에서는 표결만 한다. 그만큼 누가 상임위 운영 권한을 갖느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국회법 어디에도 정당 간 상임위 배분 방식을 명시한 규정은 없다. 상임위원을 교섭단체 의원수 비율에 따라 선임한다(국회법 제48조)는 규정만 있을 뿐이다. 상임위원장은 ‘임시의장 선거의 예에 준하여 본회의에서 선거한다’(국회법 제41조)고만 돼 있다. 다수결 원칙에 따라 본회의장 표결로 상임위원장을 정한다는 뜻이다. 체계·자구심사권을 가진 법제사법위원회를 야당 몫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도 법으로 정해진 게 아니다.

상임위 소관 법안심사소위원회의 ‘만장일치’ 관행도 13대 국회 때부터 생긴 관행이다. 법안소위는 상임위에 앞서 법안을 심사하는 기관이다. 법안소위 국회법 조항을 보면 ‘위원회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국회법 제57조)고 되어 있다. 재적위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위원 과반수가 찬성(국회법 제54조)하면 법안 심사를 의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법안소위는 그동안 줄곧 ‘만장일치’로 운영됐다. 18∼20대 국회가 법률안 5만5876건을 처리하는 동안 법안소위에서 만장일치가 아닌 다수결로 처리한 법안은 8건뿐이다.

법안도 ‘관행’의 적용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다. 선거법이 대표적이다. 법적으로 특별위원회는 기타 상임위처럼 교섭단체 의원수 비율에 따라 위원을 구성하는 게 맞지만 선거법 개정을 위한 특위만큼은 여야 동수(同數) 위원을 둔다.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14∼20대 국회에서 선거법 등 정치 개혁 관련 특위가 총 24번 꾸려졌는데 16대 당시 1회를 제외하면 모두 여야 위원 숫자가 같았다. ‘게임의 룰’을 다수당이 소수당 합의 없이 표결로 밀어붙일 수 없게 한다는 취지에서다. 16대 당시 특위에서는 선거법 개정을 다루지 않았다. 지난해 통합당의 반발에도 ‘4+1 협의체’를 통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도를 골자로 한 선거법 개정을 밀어붙인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선거의 룰인 선거법을 국회 전체(합의)로 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집권당의 대표로서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 ‘관행’의 시작, 1987년 민주항쟁
이러한 국회의 관행은 대부분 1987년 민주화 이후 생겨났다. 의석수 비율에 따라 상임위를 배분하는 관행이 자리 잡은 건 1988년 개원한 13대 국회 때부터다. 여야 구분이 명확해진 3대 국회 때부터 12대 국회까지 원 구성 사례를 살펴보면 5대 국회를 제외하고 모두 여당이 상임위원장을 독식했다. 처음으로 정당 간 상임위를 배분한 5대 국회는 5·16군사정변으로 1년도 안돼 해산했음을 감안하면 거의 매 국회마다 여당이 상임위를 독차지한 셈이다. 유신체제 때인 9대 국회에서도 부의장 한 자리는 야당에 줬지만 상임위는 여당이 독차지했다.

13대 국회는 사정이 좀 달랐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125석을 얻는 데 그치면서 처음으로 ‘여소야대(與小野大)’ 지형이 만들어졌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상임위 여야 배분은 야당의 협조 없이는 국정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생긴 타협의 산물”이라고 했다.

법안소위 만장일치 관행도 이때부터 생겼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지난해 ‘상임위 법안소위 의결 방식’ 보고서에서 “법안소위에서 한 명이라도 반대하는 위원이 있으면 의결하지 않는다는 것은 13대 국회 이후 자리 잡아 온 ‘협의에 입각한 국회운영의 관행’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체계·자구심사권을 가진 법제사법위원장을 야당 몫으로 하는 건 비교적 늦게 생겨난 관행이다. 법사위는 15대 국회 전반기까지만 해도 여당 차지였다. 하지만 15대 국회 임기 중간에 있었던 1997년 대선을 계기로 야당이 된 신한국당(통합당 전신)이 여당 지위를 잃고서도 제1당이라는 명분으로 후반기 원구성 협상에서도 법사위를 고수하면서 ‘법사위=여당’ 공식이 깨졌다.

그렇다고 이때부터 ‘법사위=야당’ 관행이 굳어진 것은 아니다. 16대 국회에서도 법사위는 야당인 한나라당이 맡았지만 이때도 제1당이라는 이유가 컸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17대 국회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한 뒤 한나라당이 ‘다수당 견제 수단이 필요하다’며 법사위를 요구해 관철시킨 뒤 18, 19대 국회까지 야당 의원이 법사위원장을 지냈다. 하지만 20대 국회 전반기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 소속 권성동 의원이 법사위원장을 맡은 점을 감안하면 ‘법사위=야당’을 관행이라 말하긴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 거여(巨與) 등장으로 불붙는 ‘관행 vs 법’ 논쟁
관행은 어디까지나 ‘권고 조항’. 국회가 모든 결정을 국회법에 따른 힘의 논리, 즉 표 대결에 부치는 것보다 최대한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점을 찾는 게 바람직하다는 명분 덕에 나름대로 이어져왔다. 관행 대부분이 야당의 요구로 생겨났거나 소수당이 다수당을 비판하는 논리로 줄곧 소환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모든 관행이 금과옥조(金科玉條)가 아닌 만큼 불필요한 것들은 이번 기회에 정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명분에 집중하다 보면 여야 간 합의까지 지나치게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반대를 위한 반대’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대표적인 게 법안소위 만장일치 관행이다. 20대 국회에서 상임위 간사를 지낸 민주당의 한 의원은 “흔히들 야당이 법사위를 이용해 여당의 발목을 잡는다고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만장일치 관행으로 무장한 법안소위”라며 “20대 국회 당시 데이터3법 등 양당 지도부가 합의했음에도 의원 한두 명의 반발로 시간을 지체한 법안이 상당하다”고 전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당론으로 추진 중인 ‘일하는 국회법’에 법안소위 만장일치 관행을 없애는 내용을 포함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정치권에서는 176석 거대 여당과 103석에 불과한 제1야당이 힘을 겨루게 되는 21대 국회에서는 관행과 법이 충돌하는 사례가 더욱 많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김형준 교수는 “민주당은 다수결의 원칙 아래에서는 ‘절대 강자’가 되는 반면 통합당은 관행과 여론 외엔 기댈 곳이 없는 무기력한 약자가 됐다”며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서로 법과 관행을 강조하는 싸움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김 교수는 “원 구성 협상 갈등과 그로 인한 53년 만의 여당 단독 개원은 그 시작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강성휘 기자 yolo@donga.com
#21대 국회#상임위원장#법#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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