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은 강원도에서도 오지에 속한다. 태백산맥이 관통하는 중심부에 위치해 대부분의 지역이 높고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구불구불 굽이진 도로는 기본이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구간도 많아 운전이 쉽지 않다. 그래도 빼어난 풍광 덕분에 눈은 즐겁다. 특히 ‘골지천 산소길’과 ‘운탄고도’는 정선에서도 손꼽히게 아름답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즐기기에 좋다.
골지천의 느릿느릿 평화로운 풍경
정선 북쪽에 자리한 골지천은 동에서 서로 흐른다.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한 골지천은 한강의 최상류 하천이다. 골지천을 따라 임계면 미락숲에서 여량면 아우라지까지 이어지는 길을 ‘골지천 산소길 1구간’이라 부른다. 23.3km 길이의 굽이굽이 흐르는 골지천이 빚어낸 강변 풍경을 즐기기에 좋다.
산소길은 원래 걷는 길이다. 하지만 굳이 걷지 않아도 된다. 정선에서도 외진 데다 오가는 차들이 거의 없어 느릿느릿 자동차를 몰고 달릴 수 있다.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절경은 없지만 한갓지면서도 평화로운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산소길의 시작점은 임계면 낙천리의 미락숲이다. 골지천과 임계천이 모이는 합수머리에 있어 섬 같은 느낌이다. 50그루가 넘는 아름드리 느릅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로 사계절 내내 캠핑족들에게 인기가 높다. 꼭 캠핑이 아니더라도 돗자리를 펴고 느릅나무 그늘에서 잠깐 쉬어도 된다. 나뭇가지와 잎을 흔드는 바람소리, 흘러가는 물소리만 듣고 있어도 더위가 잊혀진다.
미락숲에서 나오면 본격적으로 골지천 산소길로 접어든다. 구미정길을 따라 두 개의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는 골지천, 오른쪽으로 산을 낀 산소길이 나온다. 골지천 풍경은 사랑스럽다. 너른 천변에는 물놀이를 하거나, 낚싯대를 드리우거나, 돗자리를 깔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구불거리는 물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구미정이 눈에 들어온다. 구미정은 ‘남한강 수계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다’는 정자다. 조선 숙종 때 공조참의를 지낸 이자가 당파 싸움에 회의를 느껴 관직을 버리고 칩거할 때 지었다. 아홉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 해 구미정으로 이름을 지었고 현재 정자는 1946년 중수했다.
정자 자체는 평범하다. 하지만 주위 풍경은 예사롭지 않다. 구미정 앞에는 골지천이 흐른다. 커다란 바위들을 만난 물길은 제법 큰소리를 내며 바위를 감아 흐른다. 물 건너편에는 절벽처럼 수직으로 우뚝 솟은 언덕이 보인다. 정자에 걸터앉아 주위를 보고 있으면 호사를 누리고 있는 듯하다. 세상일은 잊고 낮잠을 자고 싶은 충동이 절로 든다.
물 건너편에서 구미정을 둘러싼 풍경을 보고 싶지만 폭 10m 정도의 골지천을 건널 방법이 없다. 예전에는 출렁다리가 있었지만 수해 때 떠내려갔다. 구미정에서 5분 정도 거리에 건너편에 있는 사을기마을로 갈 수 있는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넌 뒤 마을 초입에 있는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홈병대’가 나온다. 골지천을 낀 구미정을 감상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전망대다.
골지천을 따라 산소길을 가다 보면 자동차를 세우고 잠시 풍경을 감상하고 싶은 곳들이 계속 나타난다. 월화폭포도 그중 하나다. 실처럼 가느다란 물이 흘러내리는 폭포로 그 모습이 마치 달밤 바람에 흔들리는 한 송이 들꽃과 같다 하여 ‘월화(月花)’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우렁차게 물이 내려꽂히는 모습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약 20m의 높이에서 바람이 세게 불면 물길이 흔들릴 정도로 여린 물줄기가 정겹게만 느껴진다.
풍경에 취해 가다 보면 어느새 골지천 산소길 1구간의 종착지인 여량면에 닿는다. 이곳에는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호인 정선아리랑의 정서가 깃든 아우라지가 있다. 아우라지에서부터 정선읍까지 조양강을 끼고 산소길 2구간이 연결된다. 정선읍에서는 동강의 비경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병방치스카이워크가 있다.
1000m 능선에 펼쳐진 야생화 천국
정선은 1960∼80년대에 석탄으로 유명했다. 탄광들은 모두 폐광됐고 지금은 흔적만이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 1000m 능선에 펼쳐진 ‘운탄고도’도 그중 하나다. 고한읍 만항재에서 신동읍 함백역(40km)까지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 운탄고도다. ‘석탄을 나르던 옛길’이라는 의미이지만 요즘에는 ‘구름이 양탄자처럼 펼쳐져 있는 고원 길’이란 뜻으로 더 알려져 있다.
만항재나 새비재에서 출발해 운탄고도를 걸어갈 수도 있고, 자전거로 즐길 수도 있다. 손쉽게 운탄고도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은 하이원리조트에서 시작되는 화절령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왕복 2차로의 포장도로를 가다 보면 자갈과 흙으로 된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주위 풍경이 색다르다. 석탄을 실어 날랐던 흔적이 남은 듯 주위의 흙과 자갈이 검은색이다. 계단식으로 다져진 땅에는 예전 탄광촌이 있었던 건물의 잔해들이 남아 있다. 경사가 높은 길을 오르다 보면 한쪽에 작은 기념비를 볼 수 있다. ‘이곳은 운락국민학교가 소재하던 곳으로서 1967.3.1 설립되어 22회 544명의 학생이 졸업하였고, 폐광으로 인한 이주 현상으로 1991.2.28 폐교되어 본 건물을 철거하게 되었습니다.’ 정선교육청이 1994년 세운 비석이다. 거의 30년이 흐른 현재 아이들이 뛰어놀았을 운동장에는 각종 야생화와 잡초들만 남아 있다.
운락국민학교 터에서 조금만 가면 야생화 천국인 화절령이 나온다. 배고픈 시절 진달래를 비롯한 야생화를 꺾어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고 해서 ‘꽃꺾이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화절령은 꽃꺾이재의 한자 이름이다. 고갯길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야생화에 마음을 얹어 풍요로운 산책을 즐기면 좋다. 현재 화절령에는 350종 이상의 야생화가 피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절령 삼거리에는 만항재 20.2km, 새비재(타임캡슐공원) 17.8km, 사북 7km가 떨어져 있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만항재 방향으로 약 2km 올라가면 사거리가 나온다. 그 주위에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함백산과 맞닿은 백운산 중턱의 도롱이연못은 화절령 인근에 살던 광부의 아내들이 갱도에 들어간 남편의 무사고를 빌었던 곳이다. 이 못은 탄광 갱도가 지반 침하로 무너지면서 생겨났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연못이 생기자 도롱뇽이 알을 낳기 시작했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에 마르지 않는 연못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날이 좋을 때는 연못에 비친 구름 풍경이 주위 나무들과 어울려 신비로운 느낌을 연출한다. 도롱이연못에서 만항재 방면으로 조금 가면 ‘1177갱 입구’가 나온다.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갱도로 해발고도가 갱도 이름이 됐다. 갱도 앞에 도시락을 든 광부 동상이 세워져 있다.
운탄고도는 석탄을 실어 나르던 트럭이 다녔을 정도로 길이 잘 닦여 있는 편이다. 화절령 삼거리에서 만항재 방면 일부 구간은 포장도 돼 있다. 하지만 승용차가 다니기 힘든 곳도 나온다. 또 도로 폭이 자동차 한 대만 지날 수 있어 맞은편에서 다른 자동차가 온다면 후진도 감수해야 한다. 화절령길부터 1177갱까지 왕복 3시간 정도면 걸을 수 있다. 한여름이라도 지대가 높아 다른 곳보다 5도 정도 기온이 낮다.
화절령 삼거리에서 새비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마지막 장면을 찍었던 타임캡슐공원에 닿는다.
만항재 아래에는 신라시대(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정암사가 있다. 정암사에는 국보 승격을 앞둔 수마노탑이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