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 때 ‘분경금지법’ 제정해… 관료들 부정부패 엄하게 처벌
성종 때 ‘경국대전’에 법제화… 위반시 1000리 유배 보냈어요
2016년 9월부터 시행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률이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요. 바로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입니다. 오늘은 분경금지법의 내용에 대해 알아보고, 오늘날의 청탁금지법과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분경금지법의 제정과 변화
분경(奔競)은 분추경리(奔趨競利)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분추경리란 바쁘게 다니며 이익을 다툰다는 뜻인데, 벼슬 혹은 이익을 얻기 위해 권세가 높은 집을 분주하게 찾아다니며 청탁하는 풍습을 가리킵니다. 조선의 건국 세력은 관료의 부패가 심해지면서 고려가 멸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건국 초부터 관료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정종 시기에 분경금지법이 만들어졌습니다.
분경금지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어떤 사람이 원통하고 억울하여 고소할 일이 있으면 해당 관청에 가서 민원을 해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억울한 일이 있으면 벼슬이 높은 사람을 찾아가지 말고 해당 관청에서 공식적인 절차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었죠.
둘째, 민원인(청탁하는 사람)과 권력자 간의 만남을 금지했습니다. 정종은 민원인이 왕의 친척, 높은 관리, 개국 공신 등의 집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아주 가까운 친척만 제한적으로 출입하게 했습니다. 민원인이 친척을 통해 권력자에게 청탁하면 민원인과 권력자 모두 엄히 처벌하도록 하였습니다.
정종 시기의 분경금지법은 청탁의 유무와 관련 없이 권력자의 집에서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처벌한다는 점에서 가혹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종 이후 분경 금지의 범위를 두고 몇 차례 논의를 거쳤으며, 성종 시기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습니다.
경국대전에는 이조와 병조의 고위 관료,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 재판에 관여하는 고위 관료 등을 분경 금지 대상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 동성(성씨가 같음) 8촌, 이성(성씨가 다름) 6촌, 처의 6촌, 이웃 사람 등만 출입을 허용하고, 나머지 사람이 출입하면 처벌하도록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분경금지의 대상이 되는 고위 관료의 집에 가까운 친척과 이웃만 출입을 허용하고, 그 외의 사람들이 방문하면 처벌한 것이지요. 정종 시기에 비해 달라진 내용은 분경 금지 대상을 명확히 하고, 청탁을 한 사람만 처벌하도록 개정했다는 점입니다.
분경 금지 조항을 어기면 장(杖·죄인의 볼기를 큰 몽둥이로 때리는 처벌) 100대에 1000리 밖으로 유배를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었고, 지나치게 가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경금지법은 경국대전에 법제화된 이후에도 여러 차례 개정이 논의되었고, 영조 시기에 편찬된 ‘속대전’에 다시 법제화되었습니다. 속대전에서는 분경 금지 대상 인원을 축소하고, 1년 내내 분경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인사철에만 분경을 금지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분경금지법을 통해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방지하는 한편 청렴결백한 생활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관료들은 사불삼거(四不三拒·하지 말아야 할 4가지 행동과 거절해야 할 3가지 행동)를 생활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사불은 △부업을 하지 않고 △땅을 사지 않고 △집을 늘리지 않고 △부임지 특산물을 탐하지 않는 것이고, 삼거는 △윗사람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고 △청을 들어준 것에 답례하지 않으며 △경조사에 부조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청탁금지법의 제정과 변화
청탁금지법은 대법관과 국민권익위원장을 지낸 김영란이 처음 제안해 제정되었기 때문에 ‘김영란법’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법안은 공직자의 부정한 금품 수수를 막겠다는 취지로 제안됐습니다. 입법 과정에서 적용 대상이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직원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청탁금지법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청탁 금지와 금품 수수 금지 조항입니다. 청탁 금지는 누구나 직접 또는 3자를 통해 공직자 등에게 부정청탁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부정청탁 대상 직무를 인사 개입, 수상 선정, 학교 입학, 성적 처리 등 총 14가지로 구분했습니다. 다만 청탁을 공개적으로 하거나 공익적 목적으로 고충 민원을 전달하는 행위 등에 대해서는 부정 청탁의 예외로 인정했습니다.
금품 수수 금지는 공직자 등이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에 상관없이 1회 100만 원(연간 300만 원)을 초과하는 금품을 주고받으면 형사 처벌(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도록 규정했습니다. 다만 원활한 직무 수행과 사교 등의 목적으로 공직자에게 제공 가능한 금품의 액수를 명시했습니다.
○분경금지법과 청탁금지법의 비교
두 법률은 모두 공직자의 부패를 방지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습니다. 청탁 금지의 범위를 정하고, 법률을 위반하면 처벌한다는 점도 같습니다. 예외조항이 있다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분경금지법에서는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의 집안 출입을 허용했고, 청탁금지법에서는 식사, 선물, 경조사비의 상한액을 정해 놓고 그 이하의 액수는 허용합니다.
물론 차이점도 많습니다. 첫째, 분경금지법은 청탁에 따른 뇌물이나 이후 부정한 처리와 관계없이 만남 자체를 문제 삼아 처벌했습니다. 실제 청탁이 있었는지 밝혀내기 어려워 청탁의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도 집안에 출입한 것만으로도 처벌한 것이죠. 반면 청탁금지법은 공직자가 원활한 직무 수행을 위해 민원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만 뇌물을 받고 편의를 봐 주거나, 허용 범위를 넘어선 식사나 선물 등을 받으면 처벌됩니다. 둘째, 분경 금지의 대상이 되는 관리의 수보다 청탁 금지의 대상이 되는 공직자 등의 수가 훨씬 많다는 점입니다. 분경금지법은 조항에 명시할 정도로 수가 적은 반면 청탁금지법은 현직 공무원, 언론인, 교원 등이 모두 대상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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