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은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의 창립 100주년 기념일이었다. 1920년 한국 스포츠가 첫발을 뗀 역사적인 날을 맞아 대한체육회는 6개월 넘게 행사를 준비했다. 코로나19 사태에도 600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이벤트를 계획했다. 하지만 철인3종 고(故) 최숙현 선수 사건으로 행사를 나흘 앞두고 전격 취소됐다. 그 대신 ‘스포츠 폭력 근절다짐 결의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가 이마저도 비공개 비상대책회의로 대체했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감독, 팀 닥터, 선배 선수들의 가혹행위에 시달린 최 선수는 절박하게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6개 관계기관의 문을 두드렸으나 그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22세 꽃다운 나이의 그가 내린 극단적인 선택 앞에 어떤 결의가 의미를 가질 것인가. 한 맺힌 절규를 차갑게 외면한 어른들은 여전히 면피성 쇼에만 매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 스포츠가 거둔 성과를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척박한 불모지에서 출발해 스포츠 강국 코리아의 위상을 떨쳤다.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전달했다. 아시아경기, 동·하계 올림픽, 월드컵 축구 등 성공 개최로 한강의 기적을 넘어 선진국 문턱에 올라선 위상도 과시했다. 한국은 올림픽에서 4회 연속 세계 ‘톱10’에 이름을 올렸다.
화려한 성적표의 이면에는 피눈물도 있었다. 때로는 누군가의 희생이 불의한 디딤돌이 됐다. 메달, 진학, 취업을 위해 과정은 무시되기도 했다. ‘빠따’로 상징되는 구타는 정신력 강화의 수단으로 포장됐다. 헝그리 정신, 스파르타식 훈련이 불굴의 투혼으로 미화됐다.
필자가 스포츠 기자로 지켜본 지난 세월만 되돌아봐도 참담한 순간은 많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출전의 꿈을 키우던 한 유도 대표선수는 5일 동안 굶으며 13kg을 무리하게 빼다 국가시설인 태릉선수촌 사우나에서 오전 2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당시 22세였다. 문체부와 대한체육회 등은 수습에 부산을 떨었을 뿐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한 대학농구팀 감독은 프로팀과 연습경기를 하다 자신이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실수한 선수를 때렸다. 그것도 부모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래도 우리 감독님이 애들 프로팀에 잘 보내세요.” 사랑의 매로 받아들였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한국 선수는 고개를 숙인 채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눈물을 흘렸다. 그 옆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외국 선수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호하고 있었다.
구타, (성)폭행 등 반인륜적 행태와 패악은 상당 부분 개선됐다는 게 스포츠 현장의 공통된 목소리다. 이 또한 고통의 산물이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독버섯은 여전히 존재한다. 오히려 더 은밀하고 잔인하게 자행되고 있음을 최 선수가 다시 한번 세상에 알렸다.
한국 스포츠의 백년대계라는 거창한 표현은 공허해 보인다. 지도자 면허제, 독립적인 조사기구 설치, 상시 설문조사 실시, 일벌백계…. 그동안 숱한 대책이 쏟아졌고 이번에 다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도 늘 반복되는 불행한 현실은 어쩌면 불통의 산물인지 모른다. 악습을 근절하고 상처를 치유하려면 제대로 작동하는 소통의 통로가 절실하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라도 눈 감고, 귀 닫으면 무용지물이다. 오랜 고민 끝에 용기를 낸 피해자의 한마디를 내 가족의 얘기처럼 경청해야 한다.
한 세기 전 조선체육회는 창립취지서에 이런 글을 남겼다. “강건한 신체를 양육해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며 개인의 행복을 바랄진대 그 길은 오직 하늘이 주신 생명을 신체에 창달케 함에 있으니 운동을 장려하는 외에 다른 길이 없노라.” 행복 추구가 한국 스포츠 새로운 100년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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