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이 무역 기술 경제 갈등을 넘어 민주주의, 인권 같은 이념·가치 전쟁으로 성격이 급변하면서 정부가 유지해온 ‘전략적 모호성’만으로는 대응이 어려워진 시점에 다다르고 있다는 지적이 확산되고 있다.
미중 갈등 속 한국이 선택을 강요당하는 문제는 한반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 안보 사안뿐 아니라 반중(反中) 경제 블록인 경제번영네트워크(EPN) 등 경제 사안, 남중국해 미중 군사 충돌 등 군사 현안, 홍콩 국가보안법, 신장위구르 등 인권 민주주의 문제까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현안이 터질 때마다 정부가 명확한 입장을 빠르게 내지 못하고 모호한 입장으로 시간을 끌어오는 일이 반복됐지만 미중 갈등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만큼 주요 2개국의 갈등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전략 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미중 사이 선택, 전 분야로 확산
미국은 최근 자국이 주도하는 반중 경제 블록인 EPN 참여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지난달 말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EPN의 일환으로 미국이 동맹들과 협력해 투자와 교역을 늘리기 위한 방안인 ‘블루 닷 네트워크’에 대한 한국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화웨이 5세대(5G) 네트워크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지 못하던 영국이 최근 화웨이 배제를 결정하면서 한국도 화웨이 배제 압박에 다시 직면했다. 로버트 스트레이어 미 국무부 부차관보는 21일(현지 시간) “우리는 (화웨이를 도입한) LG유플러스 같은 기업들에 믿을 수 없는 공급 업체에서 믿을 수 있는 업체로 옮기라고 촉구한다”고 밝혔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한국에 배치된 사드를 둘러싸고도 미국과 중국이 각각 한국에 장비 업그레이드나 추가 배치, 철수 등을 요구하면서 한국이 또다시 선택을 강요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탈퇴한 미국이 추진하는 중거리 미사일 배치 계획에 한국이 얼마든지 포함될 수도 있다. 여기에 남중국해에서 미중 군사 충돌이 현실화될 경우 한국이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낼 수밖에 없다.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동맹들이 참가하는 연합 군사훈련을 확대하고 있다. 한국에 이 훈련 참여를 요구해 오면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인권과 민주주의를 둘러싼 미국의 대중국 공세는 홍콩뿐 아니라 신장위구르, 티베트까지 확대되고 있다. 중국은 최근 홍콩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해 자국과 한국의 여러 외교 경로를 통해 한국에 지지를 요청했다. 일대일로 참여를 재차 압박하면서 미국의 반중 전선 참여는 중국 국익 침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정 박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는 최근 한 보고서에서 “중국은 한국을 미국의 동맹 네트워크에서 가장 약한 고리로 인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정부는 전략 수립 위한 회의만 1년
정부는 미중 갈등 속 ‘전략적 모호성’을 뛰어넘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외교전략조정회의’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달 출범 1년을 맞았지만 아직 뚜렷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28일 제3차 회의가 열릴 예정이지만 외교부 내부에서조차 “이번에도 명확한 결론이 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회의에 대해 한 전문가는 “정부가 (미중 갈등 대응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희옥 성균관대 교수는 “현 국면은 미국이 중국 체제와 이념, 가치에 문제가 있다며 공산당의 발전 전략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이라며 “한국의 전체 입장을 미국이냐 중국이냐 선택하기보다는 현안마다 하나하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섬세하게 대응 전략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한 전 외교부 차관은 “EPN은 미국이 대선 때문에 신속한 답변을 요구하는 사안”이라며 “이런 문제는 서두르면 곤란해진다. 사안별로 판단해 전략적 모호성을 줄여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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