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분장’에 비하 의도 없었다는 주장, 피부색 패러디 가능하다는 무지 노출
가해자 특권, 관행으로 굳어지는 세태… 소수자 차별 심화하는 악순환 이어져
코로나19를 겪으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해진 용어는 ‘사회적 거리 두기’일 것이다. 나는 이 용어를 처음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사회과학에서 사회적 거리란 “개인 간, 개인과 집단 간, 집단 간 심리적으로 먼 정도” “한 사회 내에서 특정 인종집단이 거부되는 수준”을 나타내는 의미로 지난 100여 년 동안 사용돼 왔기 때문이다.
코로나 확산을 막고자 물리적으로 멀찍이 떨어지고 사회적 관계를 잠시 보류하라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권장한 것이겠지만, 주류의 소수에 대한 편견을 나타내는 이 용어가 혹시 다른 사회 구성원을 잠재적 확진자로 경계하게 만들거나 ‘확진’이라는 재난을 당한 사람을 ‘우리’와 다른 ‘그들’로 취급하게 할 수 있다는 염려가 있었다. 자칫하면 아프지 않은 ‘우리’는 정상적이고 ‘그들’은 정상에서 이탈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누구나 확진이라는 사고를 당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으며 일찍 감염된 사람들일 뿐이고,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사회적 거리 두기’는 운 좋게 아직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부여된 정상이라는 특권을 무분별하게 휘두르는 폭력의 언어가 될 수 있다.
샘 오취리라는 가나 출신 방송인이 있다. 그는 최근 SNS를 통해 경기 의정부고 학생들이 졸업사진에서 가나의 장례문화를 패러디하면서 얼굴을 까맣게 분장한 것을 두고 “흑인 입장에서 매우 불쾌한 행동”이라고 비판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납치된 흑인을 전시하는 동물원이 미국과 유럽에 20세기에도 존재했고, 흑인 분장을 한 백인이 열등하고 차별당해 마땅한 존재로 오랫동안 인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조롱당한 굴욕의 역사를 떠올려 보면, 학생들의 흑인 분장에 대한 그의 비판은 정당했다. 흑인이 겪은 차별과 폭력, 죽음의 역사를 모르는 ‘우리’는 웃고 즐기지만, 그 순간 흑인은 다시 동물원에 전시된 인간이 아닌 무엇이 된다. 한국의 대중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대중은 샘 오취리의 비판이 분수를 모른다고 화가 난 듯하다. 미국에서 흑인도 아시아인을 차별하면서 이런 소소한 일로 흥분한다고 면박을 준다. 샘 오취리가 영어로 쓴 글이 한국 교육을 비웃었다고 공격한다. 의정부고 학생들에게 흑인 비하 의도가 없었다고 강변한다. 그는 결국 기자들 앞에서 사과했다.
부끄럽다. 샘 오취리가 한국 교육을 폄훼했다고 해서 의정부고 학생들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은 비하 의도가 없었다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비하 의도가 없었다고 따질 수 있는 바로 그 지점이 ‘우리’가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특권과 검은 피부색을 패러디 소재로 삼을 수 있는 무지가 차별로 전환하는 순간이다. 의도를 논하자마자 피해자의 아픔은 백안시되고 가해자 관점의 특권이 작동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에서 가해자의 진짜 의도를 파악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가해자의 의도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인권 개념이 보편적 상식이 된 근대 이후 강고해진 특권 대부분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관습과 관행, 그리고 문화라는 이름으로 스며들었다. 그래서 특권의 수혜자는 스스로 그것이 특권이라 상상조차 못 하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같이 역사적으로 가장 고약한 특권은 그것을 누리는 남성이나 백인이 당연하게 수용한 문화의 뒤편에 숨어 있었다. 우리가 웃고 즐기는 행위와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가 누군가에 대한 고정관념과 혐오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여러 사회에서 주류 인종의 우월적 지위가 그러했고, 직장에서 남성에게만 보란 듯 주어지는 기회가 그러했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해온 대로 전통을 유지하면서 특권을 재생산해 왔고 그 특권을 정당화해주는 온갖 이론과 논리를 설파해 왔다. 이는 필연적으로 소수 인종에 대한, 여성에 대한, LGBT에 대한 차별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인식하지 못하는 특권과 드러내놓고 저지르는 차별은 서로를 강화하는 동전의 양면이다.
요즘 마음속 깊이 화났다는 표현으로 ‘빡치다’라는 비속어가 자주 사용된다. 그런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여성에게 “빡쳤니?” 대신 마음이 토라진 상태를 의미하는 “삐쳤니?”를 사용해 묻곤 한다. 삐쳤다는 표현이 우리 문화에서 분노를 표현하는 주체의 강인함을 탈각시켜 여성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삐쳐 있는 게 아니다. 분노해 빡쳐 있다. ‘삐쳐서’ 침묵해야 하는 이방인인 샘 오취리가 ‘빡쳐서’ 왜 시끄럽게 하냐고 불쾌해하지 마라. 그도 빡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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