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생산방식 변화로 명맥 끊기던 디자인-제작 업체 ‘카로체리아’
희소성 무기로 제2의 전성기 꿈꿔
이탈디자인, 소량생산 자회사 설립… ‘우라칸’에 뿌리 둔 ‘제로우노’ 등
주문자 취향 반영해 5대 생산계획
페라리 디자인한 피닌파리나… 최고 속도 시속 350km
전기 스포츠카 ‘바티스타’ 선보여
자동차 디자인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으로 카로체리아(Carrozzeria)가 있다. 이전 칼럼 기사에서도 카로체리아의 성격이나 특별한 사례에 관해서 짚은 바 있고, 자동차에 관심 있다면 낯설지 않은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베르토네, 피닌파리나, 이탈디자인 등 대형 카로체리아들은 국내 자동차 산업 성장기에 국내 브랜드 자동차 디자인에도 참여해 이름을 알렸기 때문이다.
카로체리아는 영어권에서 코치빌더(coachbuilder)라고 부르는 차체 디자인 및 제작 전문 업체를 가리키는 이탈리아 말이다. 그러나 자동차 애호가 사이에서는 좀 더 특별한 존재로 여겨진다. 이는 다른 코치빌더와 차별화되는 매력과 아름다움을 뽐낸 차들을 만들어낸 이탈리아 코치빌더에 대한 일종의 경의 표시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카로체리아의 활약은 대부분 20세기와 함께 역사의 일부가 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동차 생산 방식의 변화와 더불어 완성차 업체들이 자체 디자인 역량을 키우면서 카로체리아의 일감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자동차 산업이 성장한 일본, 우리나라, 중국이 카로체리아의 마지막 엘도라도였지만, 그들이 자리를 잡은 21세기에 들어서는 카로체리아의 명맥이 대부분 끊어졌다.
그러나 지난 몇 년 사이에 그들의 이름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다양한 방법으로 이뤄지고 있다. 여전히 자동차 애호가에게는 의미가 크고, 그만큼 브랜드 가치도 높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를 좋아하는 세계 각국의 부호들은 여전히 남다른 개성과 희소성을 모두 갖춘 차들을 원하고 있다. 과거 카로체리아들이 그런 차를 전문으로 만들었던 만큼, 새로운 시대에 맞는 맞춤 제작 자동차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명망 있는 카로체리아의 이름을 되살려 제2의 코치빌딩 전성기를 꿈꾸는 업체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현대 포니를 비롯해 여러 우리나라 브랜드 차들을 디자인한 이탈디자인(Italdesign)이 대표적이다. 이탈디자인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자동차 디자이너 중 하나로 꼽히는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설립한 회사다. 그러나 2010년에 폭스바겐 그룹에 편입됐고, 2015년에는 창업자인 주지아로가 완전히 손을 떼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만 카로체리아 고유의 기능을 잃거나 파산하지 않고 주요 사업 영역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2017년에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수집가를 위한 소량 생산 자회사 이탈디자인 아우토모빌리 스페치알리(Italdesign Automobili Speciali)를 설립하고, 새 사업 부문의 출범을 알리는 모델인 제로우노를 선보인 것이다. 이탈디자인은 제로우노와 이듬해 발표한 컨버터블 버전인 제로우노 두에르타를 다섯 대씩 한정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두 모델은 모두 모회사인 람보르기니에서 만들고 있는 스포츠카 우라칸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실내외는 이탈디자인의 독창적 디자인으로 완전히 바꿔, 눈에 보이는 부분만으로는 우라칸과의 공통점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여느 럭셔리 스포츠카들처럼 차체와 내장재 등은 주문자 취향을 반영할 수 있다는 점은 옛 코치빌더 특유의 작업 방식 그대로다.
196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페라리 스포츠카를 중심으로 수많은 걸작 디자인을 남긴 피닌파리나 역시 최근 아우토모빌리 피닌파리나(Automobili Pininfarina)로 완성차 브랜드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아우토모빌리 피닌파리나는 카로체리아 피닌파리나를 인수한 인도 마힌드라 그룹이 브랜드를 활용한 완성차를 만들기 위해 설립한 자회사다. 본사는 독일 뮌헨에 있지만, 디자인 스튜디오는 이탈리아에 두어 카로체리아의 정통성을 뒷받침한다.
이 회사가 내놓은 첫 완성차는 전기 스포츠카인 바티스타다. 피닌파리나 설립자인 바티스타 파리나를 기념하는 의미로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2019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된 이 차는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이 그동안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한 미드엔진(엔진을 앞뒤 바퀴 사이에 배치하는 구조) 슈퍼카들을 연상케 한다.
고성능 스포츠카에 걸맞은 성능은 네 바퀴에 모두 달려 있는 전기 모터에서 비롯된다. 전기 모터 네 개의 출력을 모두 더하면 1400kW로 마력 단위로 환산하면 1900마력이 넘고, 최고속도는 시속 350km에 이른다. 피닌파리나는 카로체리아 피닌파리나 설립 90주년인 올해부터 바티스타의 생산을 시작해 모두 150대를 만들 예정이다.
페라리, 알파 로메오, 애스턴 마틴 등의 여러 명차를 디자인하고 차체를 만들었던 투링 수퍼레제라(Touring Superleggera·이하 투링) 역시 한동안 명맥이 끊어졌다가 되살아난 카로체리아 중 하나다. 파산은 하지 않았지만 1966년 이후 자동차 디자인과 생산에 관여하지는 않았던 투링은 2006년에 개인 투자자들이 브랜드와 상표권을 사들여 새로 설립한 회사를 통해 여러 모델을 한정 생산해 왔다.
투링은 23∼26일 영국에서 열린 한 클래식카 행사에서 새 모델인 에어로 3을 공개했다. 투링은 초기부터 공기 역학적 형태와 아름다운 디자인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던 전통을 되살려, 에어로 3에 자사가 1930년대와 1950년대에 내놓은 여러 명차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구현했다고 한다.
에어로 3은 전통적 코치빌딩과 현대적 기술을 접목해 생산된다.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투링이 발표한 자료는 에어로 3의 뼈대와 심장은 페라리 F12베를리네타의 것이다. 이미 완성돼 출고된 차를 분해하고 새로 디자인한 실내외 부품을 다는 식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품 설계와 생산에 컴퓨터 활용 설계(CAD)와 전산 유체 역학(CFD) 등 최신 기술을 통해 높은 품질과 완성도를 추구했다는 것이 투링의 주장이다. 투링은 에어로 3을 15대만 생산할 예정이다.
이와 같은 시도들은 정통성을 중시하는 애호가에게는 과거 카로체리아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유명한 이름을 빌려 마케팅에 활용하는 일종의 상술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적 기술로 만들어지는 자동차에 옛 카로체리아의 디자인과 생산 방식을 접목하려는 시도는 나름 의미가 있다. 독창적인 디자인과 특별함을 담아 소량 생산하는 차들이 자동차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다양성을 살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역사적 의미가 큰 카로체리아들이 이름만이라도 살아남아 새로운 자동차 역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이 반가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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