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보수 성향’ 배럿 대법관 지명 강행…美 대선 최대 쟁점 부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27일 10시 33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임기 중에 보수파 대법관을 잇달아 지명하면서 대법원의 이념 균형이 급격히 흔들리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를 연방대법관에 앉힌 데 이어, 26일(현지 시간) 에이미 코니 배럿 연방법원 판사를 3번째 ‘보수 대법관’으로 지명했다. 미국 대법관은 종신직인데다 배럿 판사의 나이도 48세로 젊은 편이어서 이런 보수 우위 구도는 미국에서 한동안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긴즈버그 대법관의 후임 지명을 11월 대선 이후로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민주당은 강력 반발했다. 배럿 판사의 의회 인준 문제는 11월 3일 예정된 대선과 맞물려 표심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 민주당, “긴즈버그의 몸이 무덤에서 뒤집힐 것”
배럿 판사는 이날 대법관 지명을 받는 자리에서 두 명의 ‘선배’ 대법관을 언급했다.

그 중 한 명은 자신의 인생 멘토였던 고(故) 앤토닌 스칼리아 전 대법관. 배럿 판사는 그의 법률 서기를 지낸 바 있다. 배럿 판사는 “그 분의 법률 철학은 곧 나의 철학”이라며 “판사는 법률을 적힌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 판사는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확고한 보수주의자였던 스칼리아 전 대법관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배럿 판사는 이어 자신의 전임자인 고(故)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긴즈버그는 유리천장에 금을 낸 게 아니라 아예 깨부숴버렸다”며 “엄청난 재능을 가진 여성이었고, 우리 모두에게 모범이었다”고 말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후임으로서 자신이 지나치게 보수적인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우려하는 민주당과 진보 진영을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그녀는 또 “인준을 받는다면 나는 내가 속한 집단을 위해서 이 역할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리 미국인들을 섬기기 위해 대법관의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보수색이 짙은 배럿 판사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는 트윗을 통해 “팬데믹 와중에 트럼프는 오바마케어를 박살낼 사람을 대법관에 지명하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척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긴즈버그는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후임자가 다시 되돌려 놓으려 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며 “긴즈버그는 천국에 있는 무덤에서 몸을 뒤집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인준 절차를 지연시키는데 총력을 다할 방침이다. 그러나 상원 의석은 공화당이 전체 100석 중 53석으로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공화당에서 이탈표가 대거 나오지 않는 이상 인준은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다. 다만 공화당이 인준을 무리하게 강행하면 민주당의 표가 결집되며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 낙태 총기소유 등 이슈에 보수화 불가피
26일 미국 신임 연방대법관에 임명된 에이미 배럿 연방 항소법원판사(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그의 노터데임대 동문인 동갑내기 변호사 제시 부부가 자녀들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 둘은 아이티에서 입양한 
흑인 자녀 2명을 포함해 총 7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막내 벤저민(앞줄 맨 오른쪽)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마크 메도우 공화당 하원의원 트위터 캡처
26일 미국 신임 연방대법관에 임명된 에이미 배럿 연방 항소법원판사(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그의 노터데임대 동문인 동갑내기 변호사 제시 부부가 자녀들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 둘은 아이티에서 입양한 흑인 자녀 2명을 포함해 총 7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막내 벤저민(앞줄 맨 오른쪽)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마크 메도우 공화당 하원의원 트위터 캡처
배럿 판사는 낙태와 총기소유, 이민자 등 미국 사회의 민감한 이슈에 대해 두루 보수적인 판결을 내릴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1973년 여성의 낙태 권한을 인정한 연방대법원의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려 할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

CNN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진보 성향 대법관은 4명만 있더라도 때로 보수 성향 대법관의 표를 하나씩 가져오면서 대법원이 지나치게 우경화하는 것을 막았다”며 “5대 4에서 6대 3으로 변하는 것은 단순한 표 하나의 이동이 아니다”고 해석했다. 배럿 판사는 총기 소지 권리를 명시한 수정헌법 2조를 지지해왔고, 건강보험개혁법인 이른바 ‘오바마케어’에도 부정적인 시각을 유지해왔다. 배럿은 ‘오바마케어’에 대해 대법원이 2012년 합헌 판결을 내린 것을 두고 존 로버츠 현 대법원장을 비판한 적도 있다.

1972년에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7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그는 멤피스의 로드스 컬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이후 인디애나주 가톨릭계 대학인 노터데임 로스쿨을 수석졸업했다. 같은 로스쿨 출신으로 인디애나주 검사를 지낸 제시 배럿과 결혼한 그는 아이티에서 입양한 2명을 포함해 총 7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이중 막내 아이는 다운 증후군을 앓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배럿 판사를 지명한 자리에 7명의 자녀를 모두 초대한 뒤 “미국 연방대법관 중 최초로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엄마”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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