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감염질환은 인류의 큰 불행이지만 건축 공간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해 왔다. 미국 주간지 뉴요커 최근호는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은 세균이 서식하는 어둡고 습한 골방을 없애고자 한 열망의 결과물이었다”고 되짚었다. 르코르뷔지에(1887∼1965)의 저층 필로티(벽 없이 기둥으로 형성한 공간)는 습한 땅으로부터 거주공간을 떨어뜨리기 위한 장치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건축가들이 고민하게 된 주안점은 공간 사용자의 ‘밀도’다. 효율적 집적을 멈춤 없이 추구해 온 현대 도시는 이제 그 존재 자체가 감염증 확산의 위험 요소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5일(현지 시간) “환기가 부족한 폐쇄 공간에서 코로나19는 멀리 떨어진 사람 간에도 공기를 통해 전파된다”고 밝혔다. 널찍한 공유 공간을 없애고 사용자 사이의 차단이 잘 이뤄지도록 모든 생활공간 얼개를 바꿔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코로나 이후의 건축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가’에 대한 동아일보의 질문에 응답한 건축가 4팀은 모두 “공간의 밀도를 낮춰 공기의 공유 여건을 최소화하고, 감염 위험이 큰 수직 동선(動線)을 줄이면서 횡으로 넓게 연결되는 새로운 도시공간이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이치훈 SoA건축사사무소 공동소장은 “공간 내부의 공기 질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가 관건”이라며 “공기 질과 관련된 건축 관계 법령이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국 대도시의 초고층 아파트와 오피스텔은 대체로 업무용 오피스빌딩처럼 커튼월(유리로 감싼 벽면) 구조를 적용하는데, 자연환기에 유리하지 않은 이 외피를 계속 사용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건축사무소 BARE의 전진홍 최윤희 소장은 지난달부터 국내 한 대학의 ‘병원 건축 모듈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급격하게 변동하는 음압병동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병원 공간과 시설을 가변식 모듈로 구성하는 모델을 개발하는 작업이다. 사전 제작된 진료시설 모듈을 활용해 2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주차장 터에 2주 만에 단층으로 세워졌던 레이선산(雷神山)병원이 일시적인 사례로 끝나지 않게 된 셈이다. 전 소장은 “기존 건물의 공용 공간에 탈부착하기 용이한 다목적 음압병실 모듈을 개발하고 있다”고 했다.
모더니즘 건축에서 ‘깔끔한 흰색 벽체와 바닥, 금속제 설비’로 고착됐던 병원 건축의 기본 틀을 유동적 가변 공간으로 바꿔야 한다는 공감대는 미국과 유럽 건축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김재경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는 “건축 공사 현장에서 투입 인원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장에서 모듈을 사전 제작하고 시공 현장에서는 조립만 하는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용 절감을 위해 개발됐던 조립식 건축 시스템이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방역에 유리한 건축 시스템으로 떠오른 것이다.
양수인 삶것건축사사무소 소장은 건물뿐 아니라 도시 전체의 구조 역시 보다 헐겁게, 수평 방향으로 형성될 것으로 내다봤다.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최근 수년간 급속도로 발전해온 자동차 자율주행 기술로 인해 공간과 땅의 가치에 대한 판단 기준에서 ‘접근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폭 축소될 것이라는 얘기다.
“완벽한 자율주행 시스템이 구축되면 업무를 위해 매일 2∼3시간씩 이동한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널찍하고 편안한 이동 공간 안에서 업무를 보고, 식사를 하고, 수면을 취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한 공간에 수많은 사람이 빽빽하게 모여 생활하거나 업무를 보는 모습이 아득한 옛날얘기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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