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 불’부터 ‘발암’까지… 한국인의 恨 담긴 ‘화병’의 진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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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이후 문학-기사 분석
근대엔 여성의 고된 시집살이 상징
산업화 이후엔 권력 향한 분노로

분노가 쌓여 답답한 기운이 누적된 질병을 뜻하는 화병(火病)은 근대소설에서 묘사한 ‘가슴속의 불’에서부터 최근 ‘암 걸릴 것 같다’는 표현까지 시대에 따라 변주됐다. 우리 민족 특유의 한(恨)과 맞닿은 화병이 사회와 함께 진화해온 것이다. 한때 미국의 정신질환 진단 분류체계인 DSM-4에서는 화병이 한국에만 있는 질병이라며 ‘Hwa-byung’으로 표기했다.

경희대 인문학연구원 산하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박성호 최성민 교수는 의료와 문학의 융합연구를 통해 근현대의 화병 변화 양상을 분석한 ‘화병의 인문학’(사진)을 최근 펴냈다. 1900년대 이후 문학작품, 기사, 잡지 등을 분석했다.

근대소설에서는 고된 시집살이를 참는 여성들이 화병에 걸린 것으로 묘사됐다. ‘안의성’(1912년)의 주인공 정애는 시어머니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가 시누이들의 모함을 받고 친정으로 쫓겨나 화병에 걸린다.

일제강점기 우국충정으로 생긴 화병은 남성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최남선은 1909년 잡지 ‘소년’에 “신경쇠약이라는 병에 걸렸다”고 발표했다. 박 교수는 “속 편하게 살면 앓지 않을 병인데, 세상을 근심하는 글을 읽고 쓴 결과로 표현한 것”이라며 “화병이 우국지사의 자부심으로 거듭난 것”이라고 했다. 이는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 나도향의 ‘젊은이의 시절’ 주인공이 신경증에 걸리는 설정에도 나타난다.

산업화, 민주화 시대에는 사회와 권력에 대한 분노로 확대됐다. 1920∼1997년의 신문 기사를 분석한 결과 화병이라는 단어는 1988년에 가장 많이 쓰였다. 1987년 1월 경찰의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씨의 부친 박정기 씨는 동아일보 1988년 1월 13일자 ‘철아, 아부지가 다시 왔대이’라는 기사에서 “정권의 추태를 보다 못해 울홧병까지 생겼다”고 말한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화병에 걸린 듯한 젊은 세대의 묘사도 나타났다. 김영하 소설 ‘퀴즈쇼’(2007년)에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가장 똑똑한 세대’인 젊은 주인공이 “우리는 왜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라며 울분을 토한다.

연구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2017년 대통령 탄핵 등을 거치며 화병의 진화는 세대별 계층별로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끝을 맺는다. 최 교수는 “문학을 분석하는 연구로 출발했는데 사회상과 맞물린 일종의 문화연구가 됐다. 화병은 우리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설명하는 키워드”라고 말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화병의 인문학#박성호#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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