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5년차 정모 씨(37)는 최근 남편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환에서 정자가 생기지 않는 ‘비 폐쇄성 무정자증’이었다. 하지만 출산을 포기할 순 없었다.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갖기로 결정한 부부는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누구의 정자를 받느냐를 놓고 두 사람의 의견이 달랐다. 정 씨는 “남편은 형의 정자를 받고 싶어 하지만 아이가 커서 그 사실을 알게 될까 선뜻 내키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여자를 찾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 남성 난임 최근 5년 간 47% 증가
정 씨처럼 남성 난임으로 고민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 난임 치료를 받는 환자는 수년째 연간 약 20만 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 중 남성 난임 환자만 크게 늘어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남성 난임 진료 인원은 2015년 5만3980명에서 지난해 7만9251명으로 46.8% 증가했다. 반면 같은 기간 여성 환자는 16만2083명에서 14만5492명으로 10.2%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남성 난임 환자 증가의 원인으로 스트레스와 비만, 환경호르몬, 만혼 등을 꼽는다. 문두건 고대구로병원 비뇨의학과 교수는 “난임의 원인이 남성에게만 있는 경우가 약 30%, 남녀 모두에게 있는 경우가 20% 정도로 난임 부부의 절반가량은 남성에게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남성 난임 환자 중 정자가 없어 기증을 받아야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의료계는 무정자증 환자 비율을 10~15% 정도로 본다. 무정자증은 정자가 생산 되지만 정상적으로 배출되지 않는 패쇄성과 생산이 안 되는 비 폐쇄성으로 나뉜다. 후자가 약 60%를 차지한다. 지난해 남성 난임 진료 환자 수에 대입하면 4755~7133명을 정자 기증이 필요한 경우로 추산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정자를 기증받는 경우는 이보다 훨씬 적다. 박남철 부산대의대 비뇨의학교실 교수(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 이사장) 연구팀에 따르면 남성 난임 환자 중 인공수정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약 12%. 2015년 기준 비배우자의 정자를 사용한 체외수정 시술은 740건이었다. 이는 한국 특유의 강한 혈연주의 영향이 크다. 무정자증이라는 사실이 주위에 알려지는 것이 싫어 시술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 정자 구하기 갈수록 어려워져
전문가와 난임 부부들은 정자 기증과 관련한 시스템과 규정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생식세포 이용 규정을 담은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생명윤리법)’은 난자 기증에 대해서만 명시돼 있다. 정자 기증은 관련 학회나 의료기관에서 제정한 윤리지침을 따른다. 이는 자율규제라 강제성이 없는데다, 기증자 조건이나 시술 횟수 등 세부 지침도 제각각이다.
정자 기증자를 구하기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정자 기증자와 난임 부부를 이어주던 ‘정자은행’은 한 때 10곳 이상이었지만, 최근엔 5곳 정도만 운영 중이다. 국내 최초로 정자은행을 운영했고, 현재도 가장 규모가 큰 부산대병원의 올해 정자 기증자는 지난달까지 53명이다. 수도권 대학병원의 한 비뇨기과 교수는 “예전엔 의대생 등 대학생의 정자 기증이 그나마 있었는데, 최근엔 이마저도 줄어드는 추세”라고 말했다.
반면 해외에선 난임 해결과 남성의 가임력 보존, 저출산 해소 등을 위해 정자 기증이 활발하다. 미국은 한 해 3만 명 이상이 정자 기증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벨기에는 2010~11년 공여 정자를 통해 1만3048건의 시술이 진행됐다. 남편의 동의가 필수라 부부에게만 정자를 기증할 수 있는 한국과 달리 미혼 여성도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스웨덴에선 기증자의 절반가량이 미혼모나 레즈비언 커플에게 기증된 것으로 조사됐다.
정자 기증과 관련 규정도 구체적이다. 스페인은 공여 횟수를 6건의 임신까지로 제한하고, 영국은 출생아 기준으로 10명까지 가능하다. 일본과 중국은 5명이다. 기증자의 나이도 미국, 독일 등은 40세 미만, 중국은 45세 미만을 권장하는 등 가이드라인이 명확하다.
● ‘공공정자은행 설립’ 논의는 제자리걸음
출산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여 난임 부부의 고충을 덜기 위해선 공공정자은행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공공정자은행이 없는 유일한 국가다. 정부는 2015년 체계적인 정자 기증 시스템을 마련하기 위해 공공정자은행 설립을 논의했지만,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국회에서 제동이 걸렸다.
지난해에는 세계 최대 정자은행을 보유한 덴마크의 크리오스사가 한국에 100억 원을 투자해 정자은행 설립을 추진했지만 정부의 반대에 막혀 무산됐다. 정자 거래가 상업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우려해서다. 실제로 미국에선 정자 기증자에게 최대 1500달러(약 172만 원)의 금전적 보상이 이뤄진다.
전문가들은 정자의 상업적 거래나 불법 매매를 막기 위해 공공정자은행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자 기증자의 조건과 최소한의 보상 기준을 명확히 하고, 공여 정자의 질 관리 수준을 높이자는 취지다. 박남철 교수는 “일반적인 기형아 출산율은 약 4%인데 반해, 공여 정자를 통한 출산은 1%로 낮아진다”며 “공공정자은행을 통해 남성 난임 치료를 활성화하면 저출산 극복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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